파란의 중장년기 3

by Branmaker 박중규

추억 3


하지만 땅을 산 나로서는 누구에게 복비만은 줘야 하기에 일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내 살던 삼만 원짜리 초가집을 팔아서 계약금과 복비를 주고 남은 돈으로 우리가 산 밭에 판잣집을 하나 지었다. 내가 살던 삼만 원짜리 초가집을 이만 원을 받고 팔았으니, 밭값은 계약금만 주고 전액을 줄 돈은 단 돈 일전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을 두 달 하였고, 또 두 달 동안에 일을 하여 품삯을 받아 그 돈을 줄 생각을 하고 그렇게 계약을 멀리 한 것이었다. 막노동 일꾼 같으면 일 년을 일을 해도 그 땅을 살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당시에 일류석공은 보통 일꾼 품삯의 4, 5배는 벌었다.


누구가 일을 하는데 가서 내가 조금 일을 하자고 하면 서울에서는 그다지 괄시하지 않는다. 나는 일류 석공이기도 하지만 서울에서 내가 큰 공사를 많이 하청을 했다. 그러므로 나를 괄시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지금 이날까지도 내가 한 일이 남아 있는 곳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수두룩하다. 기차를 타고 가며 보아도 내가 한 일이 가끔 보이고, 서울 시내에는 내 손으로 한 일이 수백 군데도 넘는다.


하지만 천호동으로 이사를 오고 보니 석공들을 자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삼각산 중턱을 찾아갔다. 다행하게도 주택영단에 감독을 하던 강씨라고 하는 사람을 거기서 만났다. 해서 나는 그 공사장에서 석축일을 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일을 할 때는 재건촌에 살고 있는 강씨라고 하는 사람을 그곳에 데리고 가서 내 대모도 일을 시켰다. 그러나 그 일은 한 달 정도밖에 못하였다.


그런 다음 나는 워커힐 공사에 가서 다시 일을 하였다. 그곳에는 그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해서 두 달 만에 내가 산 밭 850평 값을 줄 수가 있었다. 그런데 두 달 동안에 그 땅값 전액을 다 벌지는 못하여서, 남의 돈 몇 천 원을 빌려서 전액을 다 채워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다음에 딴 곳에 가서 조금 벌어서 그 돈은 다 잡았다. 이제는 천호동 지방에 850평이 내 땅이 되었다. 그러나 바로 그 해 여름에 큰 물이 져서 우리가 살던 집이 죄다 떠내려 갔다. 처의 말만 들었으면 전 살림은 다 잃지는 않았을 것을 내가 아는 척 고집을 피우다가 우리는 집뿐만 아니라 살림살이 전부를 물에 떠내려 보냈다.


그러다 보니 소위 가장이라고 하는 내가 제일 생각을 못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갈밭에 좋은 흙이 많이 들어앉아 이제부터는 토질이 일등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높은 곳에 붉은 벽돌 조각으로 방 하나 부엌 하나를 만들었다. 그런 다음 나는 다른 곳으로 일을 조금씩 하러 다녔다. 그리고 밭에는 고구마, 호박, 배추 같은 것을 심어서 팔았다. 그리고 큰 아들 둘째 아들도 공장에 다니면서 독학을 하였다.


그렇게 하고 보니 우리의 삶은 조금 나아졌다. 그래서 철거민 속에 집터를 하나 얻어 벽돌 아닌 블록으로 집을 하나 지었다. 지붕은 슬레이트고 집은 삼간이었다. 그렇게 해 놓고 지금 암사시장 있는 곳에 논 같지도 않은 논을 육백 평을 샀다. 그것은 다른 돈이 있어서가 아니고 우리 집 앞에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논을 산 것이다.


그리고 우리 집 앞에 밭은 우리가 아무런 곡수도 조지 않고 그 밭과 그 밑에 밭 다 우리가 부쳤다. 그러다가 보니 우리는 조금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철거민촌 위에 작은 땅을 육십 평을 샀다. 그러고 있을 즈음 내가 산 논을 내가 잘 아는 사람이 자꾸 팔라고 소개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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