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7
건천면에서 유지들은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면장하고도 같이 논적이 있고, 농협 지부장은 나와 아주 친하여 아무것도 잡히지 않고 조합돈 백만 원을 내주었고, 또 국민학교 교장 또 화천의 유지들, 경주 시내에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나와 제일 친한 사람은 이원우씨이다. 그분은 그 당시 국회의원으로 있던 이은우씨의 동생이다.
그러함으로 경주 시내에서는 제대로 논다는 사람은 내가 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쓰지 않고는 다른 동유들과 같이 놀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서 그러한 유지들과 거의 매일같이 어울렸다. 바둑을 두고, 가끔 화투도 치곤 하였다. 바둑도 내기 바둑이었다. 아마추어로서는 내가 바둑을 매우 잘 두었기 때문에 더 잘 두는 사람들과도 내기를 하였고,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일을 하지 않고 그렇게 놀다가 보니 과수원이 될 턱이 없다.
어느 날 홀연 나는 집에 가지 않고 서울로 올라와서 족숙 박일동씨에게 돈을 백오십만 원을 얻어서 무슨 장사라고 하면서 혼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울 약수동 국민학교 여자 선생이 내가 혼자 사는 것을 알고 매일 같이 학교일이 끝이 나면 내 옆으로 달려와서 놀자고 하였다.
그 여인은 그런대로 똑똑한 편이었다. 그 당시에 내 딸 명자는 영등포 모 회사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여인과 딸이 살고 있는 집을 찾아갔다. 선생질을 하여도 남자한테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경주 과수원에 가면 처가 있다고 하여도 그 여인은 내가 서울에 있을 때까지는 나를 만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가족을 버리고 온 내가 그와 같은 여인과 계속해서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약수동 시장에 어물 가게를 하나 차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내가 파는 물건을 잘 사지 않았다. 똑같은 물건이라도 내가 파는 물건은 몇 십원씩 덜 받아도 젊은 사람들이 있는 집을 찾아가서 돈을 몇 십원씩 더 주고 사가지고 간다.
장사도 나이 많은 사람은 안된다 하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러나 그 가게를 팔려고 하니 원가의 삼분의 일 밖에 안 주겠다고 한다. 해서 나는 그냥 계속 장사를 하였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내가 먹고 세금을 내고 나니 얼마가지 않아 상점에 물건은 전연 없었다. 해서 나는 백오십만 원이라는 돈을 얼마가지 않아 다 까먹고 말았다.
바로 그때 경주서 내가 있는 곳을 알고 과수원을 팔라고 인감도장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과수원을 매매하려고 경주로 내려갔다. 내 자식들은 많은 걱정을 한 모양이다. 해서 나는 자식들 볼 면목도 없이 과수원 매도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어쨌건 그 과수원은 나의 피땀으로 이루어 진 것인데, 한편 섭섭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내가 그 땅을 버리고 바람이 난 것은 전부가 내 탓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지금까지도 말을 한다. 그러나 우리 집 식구들은 일체 내가 잘못해서 만사가 잘못된 줄만 안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이 아니다.
그 모든 잘못은 어머님과 내 처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어머님께서는 며느리와 손자들은 생각해서 그렇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처는 전연 아무것도 모른다. 남편인 내게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속이 좁은 나는 어떤 때는 흉죽이 막힐 때도 있다.
다만 잘하는 것은 어른들에게 잘한다는 것, 그것뿐이지 내조라는 것은 일절 없고, 내가 무슨 말을 한마디 하면 내처는 내 오장육부를 뒤집어 놓고 만다. 그러나 내 처는 천성이 나빠서 그렇다기보다 원체 무식하여 그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