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3
저녁밥을 먹고 나서 나는 곧바로 들판으로 나갔다. 그것은 우리 농장에 산돼지가 와서 피해를 입힐까 봐 돼지를 쫓으려고 나가는 것이다. 내가 농장에 나가지 않으면 나 대신 우리 할아버지가 들판에 나가서 돼지를 쫓아야 한다. 그래서 저녁술을 놓기가 바쁘게 나간 것이다.
산골은 그때 시절에는 들녘까지도 산돼지가 내려와서 피해를 입히곤 하였다.
넘은곡을 넘어섰다. 옥녀봉 산 중턱 어딘가에서는 두견새의 애끓는 울음소리가 구슬프게 들려온다. 두 다리를 훨훨 걷어붙이고 이슬이 자욱한 논둑길로 더듬더듬 걸었다. 얼마 후 농장에 이르렀다.
그때서야 보름달이 동산에 솟아오른다. 뒷산이 높기 때문에 열 나흘 저녁달도 그렇게 늦도록 볼 수가 없었다. 깜깜한 논둑길로 더듬거리며 나오느라고 두 바짓가랑이가 이슬에 젖어 물에 빠진 듯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무를 주워다가 불을 피우고 옷을 말렸다. 그런 뒤 나는 적적함을 달래기 위하여 노래를 불렀다. 큰 소리로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곳은 마을 하고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소리를 쳐도 마을까지는 들리지 않는다. 또 그렇게 함으로 해서 돼지도 오지 못한다. 단순 그래서 만은 아니다. 우리 농장을 구경하는 것도 그날 밤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나로서는 울적한 심회를 달랠 길이 없었다. 더군다나 세상 누구도 모르게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여 참을 길이 없었다.
목이 터져라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 소리는 산울림으로 변하여 멀리멀리 메아리 져 흘러갔다.
바로 그때였다. 저쪽 생길가에서 "어이, 박서방"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경달의 목소리와도 같았다. 그래서 나는 경달을 불렀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섬배기 논 뚝 위에는 세 사람의 모습이 어슴프레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은 갑산댁 태방우다. 저 대신 내가 탄광으로 가게 된 것을 고맙게 여겨서 나오는지 산돼지를 지키러 나오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도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금방 내가 있는 방천 뚝 위로 왔다. 태방우와 경달이, 진묵이었다. 그들도 이슬밭에 오느라고 바짓가랑이가 온통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불을 크게 놓아 그들의 바짓가랑이를 말리라고 하였다. 속가지 불은 얼굴이 뜨거울 정도로 활활 타올랐다. 그 불을 본 경달이는 별안간 콩서리 이야기를 끄집어낸다. "야, 박서방. 느그 밭에 가서 콩 좀 뽑아 오너라." 팔월 열 나흗날 콩서리를 하는 것은 하늘에 옥황상제도 안다고 하지를 않았는가. 경달이가 이렇게 다구 쳐 나를 조른다. "야, 먹고 싶거든 네가 가서 뽑아 오너라." 내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경달은 바지가 젖을까 봐 바지를 훌렁 벗은 다음 빤스만 입고 우리 섬배기 밭으로 뛰어간다.
그는 놀기를 좋아했다. 팔월 추석 때가 되면 그때 시절에는 젊은 사람이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콩서리를 하는 것을 그다지 흉보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것을 장난의 하나로 여겨왔다. 오십육십이 되는 사람들도 콩서리를 하는 것만은 그다지 나무라지를 않았다. 당신네 콩을 뽑는 것을 보아도 그저 그러지 말아라 하고 끝냈다. 각박한 일본놈들의 세상이지만 옛날부터 내려온 콩서리의 풍습은 조금도 변하지를 않았다.
잠시 후 경달은 우리 밭에 가서 불콩을 한 아름이나 뽑아 왔다. "아이고, 이 망할 놈아. 남의 밭을 온통 망쳐 놓았구먼", "야 많이 가지고 올래도 힘이 없어 이것밖에 못 가지고 왔다." 다들 한바탕 깔깔 웃었다. 보름달은 아니라도 동편에 솟아오른 밝은 달빛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다.
우리는 콩서리를 시작했다. 콩 튀는 소리가 간혹 투닥투닥한다. 경달은 덜 익은 콩인데도 그냥 마구 주워 먹는다. 놀기 좋아하는 경달이는 입가에 검정이 묻어 먹주입 같이 시꺼멓다.
그들은 내가 내일모레면 일본으로 간다는 것은 전연 모르고 있다. 내가 일본 탄광으로 간다는 것을 안다면 그 누구도 나를 위로하려고 그러한 장난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일본 탄광을 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갑산댁 태방우 한 사람뿐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대신 가는 내가 보기조차도 민망하다는 듯이 내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러한 표시를 전혀 내지를 않았다.
잠시 후 우리는 콩서리 한 콩을 뒤적뒤적하면서 주워 먹기 시작했다. 모든 동료들이 신이 나게 주워 먹는다.
그러나 태방우와 나는 그들의 행동만 바라다보며 그저 먹는 척하고 있었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도 내심으로는 우울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얼마 후 콩서리는 끝이 났다.
나는 부산거리에서 들은 약장수의 흉내를 내었다. 그날이 음력 팔월 열 나흗날이요 그들을 잡아 두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만 했다. 내 약장수 흉내에 신묵과 경달은 좋아서 그저 싱글벙글한다. "니 참 총기도 좋다. 그걸 어찌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다 흉내를 내노? 그 약장수 얘기를 나도 들었지만 니가 그 사람보다 더 잘하는구나." 하였다. 그러나, 약장수가 전문이 아닌 이상 내가 그들처럼 장황하게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하던 얘기들 뚝 끊고 "우리 밖에서 이럴 것이 아니라 막 안에 들어가서 하자꾸나" 하였다. 그러나 경달은 계속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태방우는 "박서방 자네 말대로 막 안에 들어가서 놀자"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네 사람은 다들 농막 안으로 들어갔다. 네 사람이 들어가서 앉으면 꽉 찰 그러한 농막이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그 농막 안으로 들어가서 호롱에 불을 켠 뒤 초롱 안에 넣고 앉았다. 그리고 담배를 한 대씩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