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을 이기는 '맑눈광' 생존법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광기'다.

by 비타민W

회사 생활 중 만나게 되는 빌런들 중에는 악의로 가득 차 더 나빠지기를 연구하는 ‘노력형 악인’이 있는가 하면, 악의는 전혀 없지만 주변에 고구마를 100개씩 먹여주는 ‘맑은 눈의 광인’도 있다. 과연 누가 더 강할까? 나는 주저 없이 눈이 텅 비어 있는 동료들의 승리를 확신한다


A 씨는 화려한 언어 능력자였다. 3개 국어에 능통한 명문대 석사 출신으로, 늘 에너지를 100% 충전한 채 출근했다. 그를 처음 본 순간 나는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직감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영화 <탑건> 속 톰 크루즈의 한 장면처럼 형형한 광기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운로드 (18).jpeg 영화 <탑건>의 한 장면

새로운 충원에 대한 기대는 곧 탄식으로 변했다. 입사 초부터 인수인계를 담당했던 동료들의 한숨 소리가 파티션을 넘어서 들려왔다. 그리고 화려한 스펙에 가졌던 긍정적인 선입견은 업무 시작과 동시에 산산조각 났다. 그는 말 그대로 '유창한 깡통’이었다.

예를 들어 "메일 보내고 나중에 보고해"라는 간단한 지시를 내리면, 메일만 보내고 보고를 누락하거나 보고는 하되 메일은 보내지 않는 답답한 상황이 반복됐다.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해석을 혼자 다르게 했고, 이것이 반복되자 그는 누군가가 보낸 메시지를 보여주며 한글을 해석해 달라 요청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혼자 들어간 회의에서 본인이 적어온 글을 보여주며 “이거 이렇게 하라는 말 맞지요?”라며 내게 되물었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라고 면박을 주었지만, 그는 호탕한 웃음으로 나를 더 힘 빠지게 했다. “아!! 그렇겠네요. 죄송합니다. 하하하하!”


일종의 '질문병'이 있어 보이는 그가 동료들의 민심을 잃은 가장 큰 이유는 꼭 퇴근 직전의 동료를 찾아가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짐을 챙기는 동료에게 다가가 말을 걸면 이런 대화가 오갔다.

“저 지금 퇴근하려고요.” “아!! 그럼 빨리 여쭤보겠습니다.”

“저 지금 컴퓨터 껐는데요?” “그럼 제 자리에 가서 보실래요??”

안타깝게도 빌런들의 목표는 늘 선량한 시민들이 되는 법이다. 동료들은 본인이 피하면 다른 팀원에게 피해가 갈까 봐 끓어오르는 화를 참으며 A 씨에게 답변을 해주곤 했다. 상대의 거절 의사조차 '질문을 빨리 끝내 달라는 재촉'으로 해석해 버리는 그 기묘한 회로 앞에서 우리 모두는 무력해졌다.


나는 그가 경계성 지능이 아닐까 의심이 될 정도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언어는 ‘데이터’라면 맥락을 이해하는 것은 ‘지능’이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 “창문이 열려 있네요”라고 하면 보통 “추우니까 닫아야겠다”로 넘어가지만, 그는 “네, 창문이 열려 있네요”에서 사고 회로가 멈췄다. 인과관계의 회로가 끊겨 있는 사람에게 한국어는 그저 해석해야 할 외국어일 뿐이었다.


어느 날, 나는 그와 함께 회의에 들어갔다. 그는 긴장을 했는지 말이 빨라졌고 목소리는 회의실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컸다. 무슨 말을 하는지 내용을 알아듣기조차 힘들었고, 옆에 앉은 내 머리는 울리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난 후 참다못해 그에게 말했다.

“A 씨, 보고하실 때 목소리가 너무 크네요.” 그러자 그는 활짝 웃으며 답했다.

“아, 네!! 제가 연극을 좀 했습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대화의 의욕이 완전히 꺾였다. 그를 이해해 보겠다는 의지와 좋은 동료가 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마지막 기대마저 증발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지점에서 그의 강력한 장점을 발견했다.


회사에는 악의로 가득 찬 사람들이 있다. 특히 가스라이팅 빌런들은 상대의 반응을 조종하며 즐거움을 느낀다. 상대가 울거나, 당황하거나, 사과하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A 씨 같은 '맑눈광'에게는 그런 비꼬기나 괴롭힘이 전혀 통하지 않는다.


한 가스라이팅 빌런 B 씨가 A 씨에게 불안감을 전파하려고 슬슬 시동을 걸던 날이었다.

“최근 A 씨에 대해 안 좋은 말들이 많아요.”

“아,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잠시 후,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서 A 씨가 해맑게 말했다.

“B 님이 저에 대해 요즘 말이 많다고 하시더라고요. 다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B의 타격은 헛수고를 넘어 강력한 역공이 되어 돌아왔다. 하지만 공격의 의도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A 씨의 표정은 해맑았다. 심지어 사석에서도 “B 님도 제가 걱정돼서 그러신 거겠죠. 제가 더 잘해보겠습니다. 하하하!”라고 말했다. 회사 내 포식자가 되고 싶은 빌런들도 상대를 가린다. 그들이 절대 건드리지 않는 부류, 소위 '눈빛이 돌아 있는' 자들이다.


"저 사람은 자존감이 너무 높아서 내가 흔들 수가 없구나", 혹은 "저 사람한테는 내 가면이 안 통하는구나"를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괴롭힐 수 없으니 그들에겐 재미없는 장난감일 뿐이다.


사실 A는 광인이 아니라 '투명한 사람'이다. 남들이 보기엔 미친 것 같지만, 사실 누구보다 자기 기준이 단단한 돌 같은 사람이다. 그와 함께 일해보면 부처님도 화를 내실 거라 확신할 만큼 답답했지만, 가끔은 그의 무심함이 부러웠다.


누군가의 못된 말을 듣고 마음의 생채기가 나서 집에 돌아온 뒤, ‘그때 한마디 했어야 했는데!’라며 이불 킥을 해본 경험은 누구나 있다. 하지만 A 씨에게 그런 후회 따위는 없다. 우리가 그를 보며 묘한 대리 만족을 느끼는 건, 회사라는 정글에서 상처받지 않고 당당하게 '나'로 존재하는 그 투명한 뻔뻔함을 조금은 닮고 싶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세련된 사회성보다 나를 지키는 단단한 선과 직설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그를 통해 배웠다.


아마도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건, 약간의 '광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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