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탈 때마다 기사의 눈치를 본다. 어떤 기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을 오간다. 나는 기사의 말 한마디로 인격의 차이가 최고점과 최저점을 경험했다.
첫번째는 2년 전에 대전역에서 세종시를 가는 시내버스를 탔다. 나는 운전기사 뒷 좌석에 앉았다. 몇 명의 승객이 탄 뒤 외국인 여자분이 탔다. 외국인 여자는 당황해서인지 카드를 요금기계에 터치하다가 놓쳤다. 당황하는 외국인에게 능숙하지는 않지만 또렷하게 천천히 찾으라고 영어로 말했다. 기사님은 대략 40대 후반의 남성이었다.
외국인 승객이 주위를 몇 차례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기사님은 외국인에게 일단 자리에 앉아달라고 친절하게 서툰 영어로 말했다. 이후 몇 명의 승객이 다시 탔다. 기사님은 외국인에게 본인 연락처를 적어주며, 기사님이 세종 종점에 도착해서 카드를 찾아보겠다며 다시 대전역 오는 길에 외국인이 내리는 KDI에서 만나자고 말하며 외국인을 안심시켰다.
40대 후반의 버스기사가 영어로 승객과 의사소통이 되는 점도 놀랍고, 인내심을 갖고 최선을 다해 도움을 주려는 서비스 정신은 쉽게 흉내내기 힘든 것이다. 최종적으로 카드를 찾았는지, 외국인에게 카드를 드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외국인에게 한국은 아름다운 나라로 남겨질 것이다.
두 번째 사례는 6개월 전에 대전역에서 버스를 탔는데 나는 순간 착각을 해서 핸드폰을 요금 기기에 터치만 하면 되는데 일반 매장에서 계산할 때처럼 카드를 활성화시켜 터치를 하니 기존 교통카드와 충돌해서 계산이 되지 않았다.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몇 차례 요금 정산이 되지 않자 기사는 짜증을 내며 미리 준비하지 않고 탔다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당황했고 잠시 다른 승객이 들어올 수 있게 자리를 피했다. 또다시 시도했더니 운 좋게 요금이 처리되었다. 이때까지도 무엇이 문제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내릴 때 핸드폰 터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역시나 내릴 때 터치를 했건만 몇 차례 인식하지 못하니까 운전기사는 또 소리를 치며 그냥 내리라고 했다. 나는 무안해서 도망치듯 내렸다. 이게 웬 날벼락인가. 내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안하게 소리를 들어야 했는지를 생각하며 서글퍼졌다. 집을 걸어오는 동안 왜 안 됐을 지를 생각했다. 버스를 탈 때는 핸드폰에 교통카드가 등록되어 있으니까 상점에서 카드를 활성화시키는 작업을 생략해도 되는 것이다. 오늘 하필 나도 모르게 왜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나마 이유를 안 것으로 나는 안심을 했다. 이런 날 조금 더 친절한 분을 만났다면 좋았을걸 하는 아쉬움도 남았다. 다음에 이렇게 당황하는 분이 버스나 지하철에서 본다면 내가 얼른 도와줘야지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사람이 당황하면 아주 평범한 것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솔직히 요즘은 아는 만큼 이용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전 같으면 대부분이 비슷한 정보를 TV나 라디오, 신문 등을 통해 받고 서로 비슷하게 살았다. 하지만 요즘은 다양한 매체와 AI를 얼마나 활용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발전하면 할수록 더 바빠지는 세상이 된 것 같다. 50대 중반인 나는 아직까지는 계속 발버둥을 치며 남들을 따라가야겠다.
세 번째는 선한 영향력을 주는 버스기사님께 감사드린다. 나도 운전을 자주 하지만 운전이라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다. 순간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감사할 정도로 친절한 버스기사님을 만난다. 버스에 탈 때도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 주시고, 가는 동안에도 버스의 운전 진로에 대해서도 가끔 안내멘트를 해주시고, 내리는 승객 한분 한분 안녕히 가세요 하고 인사를 주신다. 예전에 버스기사는 자율주행이나 AI로 대체될 수 있는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AI는 친절하지는 않지만 불친절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친절한 기사님들을 보면 꼭 사람이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버스를 타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기 때문이다.
나는 버스를 장시간 타고 내릴 때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내린다. 서로가 스쳐가는 일상이지만 서로에게 사소하지만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