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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예린 Sep 07. 2024

네가 내게 처음이었듯이 나도 네게 처음이었겠지

내 모든 처음으로 인생이 결정되나요?


고등학교 때의 첫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저는 무더웠던 6월의 불 꺼진 교실로 돌아가고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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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처음으로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1월에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면서 기숙사에서 살아보는 것은 새로운 일이었습니다. 겨울이 물러날 무렵 갈 수 있을 줄 알았던 학교를 석 달 가까이 가지 못한 채 집에서 비대면 수업을 경험한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코로나가 처음이었고, 구글 클래스룸과 줌(Zoom)이 처음이었는데, 그런 모습의 학교 생활을 넘어 고등학교 생활 자체가 처음이었으니 혼란스럽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였죠.


잠깐일 줄 알았던 등교 연기는 몇 주, 몇 달로 미루어지다가 여름이 찾아올 무렵에서야 학교를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마저도 격주 등교였으니, 이게 뭘까 싶었죠. 그래도 등교를 하기는 하니 이제야 뭐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걸까. 확실한 것은 별로 없었지만 어쩌겠어요. 학생이야 학교에서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야 하는 거니까요.




그렇게 6월, 생활복도 받지 못해 불편한 하복 교복을 입고 첫 등교를 했습니다. 그날 저는 혼자 일찍 교실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기숙사에 먼저 들러도 되었겠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기숙사라는 곳이 꽤 많이 낯설었으므로, 아침 일찍 교실로 향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나 봅니다. 혼자서 교실을 가만히 둘러보면서 출석번호대로 앉으면 내 자리는 어디쯤일까, 하고 가늠해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한 친구가 교실에 들어왔습니다. 그 친구와 처음으로 인사를 하고, 통성명을 하다 보니 같은 상설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그 애는 목소리가 맑고 또 귀엽고, 성격도 순하고 다정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와서 대면으로 만나 제대로 사귄 첫 친구였고, 1학년 이후로 같은 반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2년 내내 도서부를 같이 하면서 친하게 지냈죠. 같은 반이라서, 같은 동아리라서, 알고 보니 둘 다 외동이라서, 별별 이유를 다 붙여가며 수업 심화 활동을 함께하기도 하고 점심시간에 서가 정리를 같이 하기도 했습니다. 졸업식 날 저는 준비하지도 못했던 졸업 편지까지 건네주었던 정말 다정한 친구였는데, 졸업하고 난 뒤에는 점점 서로 뜸해졌죠. 사실 그 친구를 마주할 용기가 저에게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입시를 끝냈지만 그마저도 잘 끝내지 못한, 그렇다고 재수를 택하지도 않은 저의 현실을 고등학교 친구들이 가능하면 몰랐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컸거든요.


아무튼, 고등학교에서의 첫 해를 돌이켜 보면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 갔던 날보다 가지 못했던 날이 더 많았기에 아주 많은 기억들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래서 더 애틋한 것이 이 시기가 아니었나 싶어요.


이건 2020년 8월, 제가 써두었던 기도의 일부입니다.

그래도 오늘 하루는 적당히 괜찮은 하루였어요.
왜냐하면 친구들을 볼 수 있었고,
큐브 맞추다가 체육 선생님께서 와서 말을 걸고 가주셨고,
친구들과 대회 준비하느라 바쁜 하루를 보냈음에도 더 돈독해질 수 있었으며,
또 방과 후에 체육복이 아닌 사복 입은 모습을 처음 본다면서 저보다 더 신나 하는 친구들과 함께할 수 있었고,
저녁 때는 깜짝 놀랄 만큼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던 마파두부덮밥과 초코파이가 나왔고,
지금 이렇게 감사한 일들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으니까요 :)

그러니 오늘 하루를 나름 잘 보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이 지겹도록 내리는 비가 잠시라도 멈출 수 있도록 해주시고, 이 빗속을 뚫고 나아가야만 하는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세요.

2020.08.10


그해 여름에도 비가 참 많이 내렸고, 학교에 나오지 못하는 동안 치렀어야 하는 수행평가들은 밀리고 밀리다 한꺼번에 몰려와 우리를 풍랑처럼 집어삼키는 것만 같았습니다. 방학은 유독 짧았고요.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받아본 시험 성적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점수일 때도 있었고, 중학교 때와 다르게 9개의 등급으로 나뉘어 평가받는 것도 처음이었던 때에 스스로의 위치가 상위권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솔직히 그때까지만 해도 시험 점수가 그렇게 대단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3년 동안 얼마나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지가 더 유의미할 것이라고 믿었죠. 거기다 그래도 첫 학기에 만난 친구들과 자기 주도 탐구 보고서를 함께 쓰고 수상을 하기도 하고, 기숙사에서도 잘 살았다며 우수생활상을 받고, 따라서 숫자로 나타나는 지표는 크게 유의미하지 않아 속상할 때가 있더라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믿었던 2020년이었습니다. 어쩌면 학원을 다니지 않아 입시에 대한 정보나 학생들 사이 분위기에 무감했고, 그래서 안일하고 현실감 없는 생각만 하고 산 것이라고 지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요. 어떤 점수를 받고 어떤 등수를 받는지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스스로가 어떤 공부를 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가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기숙사에서 살다가 주말까지도 학원에 종일 붙들려 있었다면 저는 아마 학교를 졸업하지도 못하고 자퇴했을 것입니다.)





정신없이 첫 학기를 보내고 짧은 방학이 끝나자 2학기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조금 더 어두운 이야기가 될지도 모릅니다. 고등학교 시절을 돌이켜볼 때 제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의 문을 여는 때가 이때부터거든요.


첫 번째 글을 읽으신 분들은 이미 아시겠지만, 저는 어린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영어를 좋아했고, 곧잘 했고, 항상 마음 한구석으로는 그리워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국제고에 입학해 듣게 될 영어 수업들도 기대했고, 외국인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랬던 저의 자존감—그러니까 어쩌면 영어에 관한 것일지도 모르고 저라는 사람 자체에 관한 것일지도 모를—이 꺾이기 시작한다고 느꼈던 시기가 바로 1학년 2학기부터였습니다.


2학기에 접어들면서 악명 높기로 소문난 과목이 하나 등장했습니다. 영어로 대중 앞에서 말하고 발표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목표가 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네 개의 알파벳으로 추려진 약자를 따서 불리던 과목이었죠. 세 개의 분반으로 이루어진 수업이었는데 두 개의 분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습니다. 피피티를 만들어야 했고, 대본을 써야 했고 또 외워야 했고, 그렇게 같은 반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은 영어로 이루어졌고요. 영어로 말하는 데에는 두려움이 없었던 저였지만 제한된 시간을 두고 ‘긴장되는 분위기’ 속에서 발표를 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 맞았습니다. 발표를 마무리한 뒤에는 더 잘할 수 있었다는 아쉬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죠. 한 친구가 수행평가를 끝낸 뒤 자기 발표 망쳤다고 저에게 한탄하는 모습을 보면서(제 시선에서는 그 친구의 발표가 제 것보다 아주 훌륭히 마무리되었기에) 속상해했던 기억도 납니다. 이 수업으로 인해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처음으로 스스로가 아주 예민한 상태라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수업을 들었던 시기에 대해 생각해 볼 때 떠오르는 것 한 가지는 외국인 선생님과 한국인 선생님이 교실 맨 뒤에 앉아 차가운 눈빛으로 발표 내용을 같이 평가하던 모습입니다. 다른 분반에서의 수행평가도 만족스럽게 마무리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시작한 두 번째 프레젠테이션이었는데, 저는 처음으로 경험했던 선생님들의 냉정한 모습 앞에서 완전히 얼어버려 다음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잊었습니다. 발표자인 제가 긴장함에 따라 같이 긴장하는 것만 같았던 교실의 분위기를 잊지 못합니다.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정말 제대로 망쳤다는 생각 밖에는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외운 내용을 잊고 얼어버리다니. 자책이 심했습니다. 어쩌면 그날 마주했던 선생님들의 눈빛에서 제가 놓여있는 현실을 비로소 실감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등학생이라는 건 결국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시기이고, 세상의 평가는 냉정하며 나는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치열한 경쟁 구도에 던져졌다는 것. 내가 평소에 무엇을 얼마나 잘하는지와 무관하게, 한 번의 기회를 망칠 때마다 나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꼴이 될 거라는 것.


그렇게 중학생 때부터 좋아했던 두 가지 모두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어에서도, 발표에서도. 사실은 재능도 없었던 게 아닐까, 내가 잘하는 게 뭘까 하는 여러 생각들이 저를 괴롭혀 왔습니다. 특목고에서 내가 잘하는 일을 찾기란 생각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켜내는 것이 어려운 시기였죠. 잘하는 것이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을 잃었고, 그렇게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을 잊었습니다.




어떻게 그 시기를 지나왔는지, 고백하자면 잘 모르겠습니다. 행복했던 순간들을 그리워하면서 그 기억을 먹고살았던 걸까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삼키면서 살았던 것일지도요. 둘 다였는지도 모릅니다.


1학년 때는 강박처럼 12시 전에 잠을 자고 새벽 5시 반쯤 일어나 아침 점호가 있기 전까지 혼자 공부를 했습니다. 훗날 그 부지런한 참새는 젊은 시절(?) 자신의 체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신입생이었기에 가능했던 생활 패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만큼 성실하게 살아가야 한다는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4인실을 쓸 때 룸메이트들 사이에서 제 별명은 새 나라의 어린이였습니다. 2인실을 쓸 때는 당시 유행했던 모 드라마의 여파로, 제 룸메이트는 저를 S대 의대에 보내야 한다고 말하고는 했으니 다른 건 몰라도 어지간히 열심히 사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나 봅니다. 시험 성적이 올랐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 드라마틱한 결과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최악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mbti도 enfj-a 유형이라 사람을 아주 좋아하는 편인데, 이 시기에도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감사하게도 좋은 사람들이 곁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다른 학교지만 기숙학교를 간 친구와 전화 너머로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여름밤이 있어서 그래도 살 만하다고 느꼈고, 힘들어할 때 집까지 찾아와 쿠키와 책과 손편지를 선물로 쥐어주고 가는 친구가 있어 고마운 마음에 또 살았습니다. 같은 반에 같은 동아리까지 하는 친구들 덕분에 학교 생활이 조금 더 즐거웠고, 좋은 룸메이트들을 만난 것만으로도 기숙사 생활을 버틸 만하다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국어 시간에 정약용의 “애절양”이라는 시를 패러디하는 수행평가를 치르고 나서 제가 쓴 시를 가지고 공개수업 때 발표를 해줬으면 좋겠다고 부드럽게 말해주신 선생님 덕분에 자신감이 조금 더 차오를 때도 있었고, 드러나지 않았을지라도 많은 부분에서 자신감을 잃었을 때 제가 무엇을 잘하는지 말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다시 회복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애틋한 기억의 조각들을 품고서 살았습니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고, 스타트가 좋아야 한다고—그런 말들을 많이 들었고 또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정도 수준까지는 해야 한다, 그것도 못하면 안 된다, 저건 기본이다, 온갖 소음이 뇌리에 박히는 것이 한국 고등학생들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조금 더 부드럽게는, ‘당장은 실패해도 괜찮아, 상승 곡선만 그리면 돼!’, ‘내신 망했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정시로 뚫으면 돼!’ 하는 말들을 희망이랍시고 던져줍니다. 저도 그 상승 곡선을 위해서 고등학교 때 열심을 다했고, 애매한 내신 성적에 일찌감치 정시로 틀어버려야 할지 고민도 했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다 보면 그만큼 조급해지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스스로가 그렇게 못나 보일 수가 없습니다. 나는 왜 처음부터 잘하지 못했을까, 하는 마음들로 스스로를 괴롭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쁘게만 보였던 저의 처음들이라고 해서 제 인생을 한 번에 결정지은 것도, 영원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발표를 망해보는 것도 생전 받아본 적 없는 시험 점수를 안고 가는 것도 전부 처음이었지만 그 몇몇의 에피소드가 고등학교에서의 ‘처음’의 전부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기숙사 생활도 처음이었던 데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탄 상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처음 같은 추억을 공유할 수 있게 되는 행복한 기억들도 제 고등학교 생활에서의 ‘처음’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사람은 기억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고, 결국 사람에게 남는 것은 어떤 시기에 배웠던 어떤 지식의 내용보다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던 순간의 기억이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디딤돌 삼아 다시 용기를 얻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저 또한 고등학교 3년 내내 스스로의 모든 처음을 끌어안은 채 그저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해 사는 법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비록 대학 입시에서 곧장 웃지는 못했을지라도 졸업한 학교에서 얻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자산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당신의 모든 처음에 너무 큰 무게를 지우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 또한 아직 많이 살아본 것도 아니지만 처음을 여러 번 겪어 보았고, 그럼에도 아직 경험해야 하는 무수한 처음이 많이 남아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처음일 수 있는 영역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처음으로 절망할 때, 혹은 처음 해본 경험으로 인해 좌절을 겪을 때는 당장 눈앞에 놓인 상황이 너무 막막하게 다가올 때가 있음을 압니다. 그래도 그 모든 처음이 나의 전부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고, 그 처음 하나하나에 지나치게 휘둘리지 않는 우리가 되기를—설령 그 처음이 내 발목을 잡는 것만 같더라도 결코 나라는 사람을 통째로 옭아맬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잊지 않을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마음을 담아,

202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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