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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예린 Aug 31. 2024

숫자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입에서 “실패한” 특목고 졸업생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안녕하세요, 읽으러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D


제 소개 먼저 하겠습니다. 필요한, 혹은 불필요한, 운이 좋다면 흥미롭고 대개는 궁금한 적 없는 정보가 쏟아지겠지만, 쓰고 싶은 글들을 써 내려가기에 앞서 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소개가 필요하겠다고 생각되어 이렇게 펜을 듭니다.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아무래도 키보드 앞에 앉아 있으니까요. 아무튼!


만으로 열아홉, 곧 스무 살 생일을 앞두고 있는 대학생입니다. 대학에서의 네 번째 학기를 앞두고 있고요. 아빠의 긴 유학생활로 인해 고향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버클리, 두 살부터 여덟 살까지는 시카고에서 살다가 초등학교 2학년 겨울에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는—아주 평범하지는 않은 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빠의 직업적 특성상 어쩔 수 없이 한국에 들어와서도 주기적으로 이사를 다니며 전학생 신분을 세 번 경험하게 되었고요. 결과만 본다면 매번 잘 적응했지만 자랄수록 적응의 과정이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나 중학교 2학년이었던 2018년, 갑작스럽게 서울로 이사를 했을 때는 그 당시의 많은 기억들이 흑백영화처럼 어둡게 남아 있는 것을 보면요.


그 후로 ‘이제는 전학 좀 그만 다니고 싶다’라는 생각에서 출발해 고등학교는 기숙학교를 들어가야겠다는 제법 확고한 목표 의식이 생겼습니다. 이왕 준비하는 거, 좋아하는 분야를 더 깊이 있게 공부할 기회를 잡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뼛속까지 문과였던 저는 외고와 국제고 중에서 고민하다가 언어를 넘어 사회 분야 과목까지 아울러 배울 수 있는 국제고 입시를 준비하게 됩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원하던 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었죠. 그곳에서 실력 있는 친구들과 겨루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분명한 것은 3년 동안 힘들었던 만큼이나 행복했고, 얻은 것이 그만큼 많았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대학 입시를 망했습니다. 그러니 '성공적인 특목고 입시', '국제고에서 명문대에 이르기까지'와 같은 소스를 기대하고 오셨다면 조용히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는 성공담도, 입시를 위한 좋은 정보를 제공하는 글도 아닐 테니까요.


물론 이 '망했다'라는 표현은 상대적인 표현이 맞습니다. 따라서 그 누구도 이 표현으로 인해 무시당한다는 느낌, 이 글 쓴 인간이 누군지는 몰라도 나를 깎아내리고 평가 절하하려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망했다는 이야기는 제가 졸업한 학교의 커뮤니티 안에서 당당하게 내보일 수 있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 사실은 일 년이 넘도록 저를 시시때때로 옥죄어 오고는 했습니다. 3년이나 소속되어 있었던 곳인데, 그 안에서 제가 스스로의 현주소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의 내일과 저의 오늘을 비교하고, 그렇게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쉬웠던 때였습니다.


졸업한 지 1년 반이 넘어서야 작은 용기를 가지고 이렇게 제 이야기를 씁니다. 시험 성적, 백분위, 등급, 석차 등등. 비록 아마추어이지만 어쨌든 나름 공식적인 '작가'로서 첫 발을 내딛으며 제가 쓰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렇게 고작 몇 개의 숫자가 한 사람의 ‘모든 것’을 증명하기라도 한다는 듯 학생들을 압박하는 암묵적인 분위기를 짚어내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조금 더 정확하게는, 숫자가 전부인 것만 같이 구는 세상이 참 싫었던 한 사람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조용하지만 분명한 저항’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부터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이 글은 이야기를 이어가기에 앞서 저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글이니까요.




앞에서 어린 시절 일부를 미국에서 보냈다고 말씀드렸죠. 모르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나누는 풍경, 부모님과 대형마트에서 장을 보고 나면 제가 어린이라는 이유로 영수증에 큼직한 ‘스마일리 페이스[smiley face_웃는 얼굴]’를 그려주던 직원들의 해사한 미소, 숙제에 오답을 내더라도 틀렸다고 질책하기보다는 칭찬할 점을 먼저 이야기한 뒤 부드러운 말로 교정해 주던 선생님, 종이로 동화책을 만드는 데 재미가 들렸다는 이야기에 친구들이 함께 흥미를 가지고 모두 그 활동을 함께할 수 있도록 재료와 시간을 제공해 주던 교실의 분위기. 제가 가진 가장 오래된 기억들은 이렇듯 따뜻한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 살면서 처음으로 경험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 너머의 세상은 개인의 권리와 영역, 자유가 다른 어떤 가치보다도 중시되던 곳이었음을 저는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밝은 면만 존재하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은 그 땅을 떠나온 뒤에서야 조금씩 더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그곳에서의 따뜻했던 기억들을 양분 삼아 제 마음이 조금 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책을 좋아하고, 상상하는 걸 좋아하고, 그래서 글을 쓰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던 그 어린아이는 미국 땅을 떠나 한국에서 살게 되었을 때도 좋아하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컸습니다. 자유를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고 자랐습니다. 남들이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금요일 밤마다 부모님과 영화를 보는 것이 행복이었고, 방학이면 엄마 손을 잡고 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외동이었던지라 가장 가까운 친구는 부모님이라서, 여행을 가지 않는 방학에는 연극이나 뮤지컬이나 음악회와 같은 공연을 함께 보는 것이 가족 문화처럼 자리 잡기도 했습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당장 눈에 보이는 성적보다는 매 학기마다 깊이 있고 즐겁게 공부하는 것이 더 가치롭다고 인정해 주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랐습니다. 세상의 시선이나 목소리와는 사뭇 달랐고, 감사하게도 그런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제게는 마음 깊은 곳에 내재되어 있는 자부심이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스스로에 대해 설명해 둔 글이 있길래 잠시 가져와 보자면 이렇습니다.

‘학교에서의 심화된 수업과 발표에 애정이 크지만, 정작 OMR 카드 앞에서는 계속 무너지던 사람. 백분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부터 내 곁에는 책이 늘 함께했고, 열아홉에도 학교 도서관에 가는 게 가장 즐겁지만, 국어 점수는 형편없었던 사람.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영어를 쓰는 게 즐겁고 회화, 작문, 독해를 꽤나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객관식 시험에서 영어 점수를 잘 받는 건 정말 쉽지 않았던 사람. 그러면서 끝까지 학원은 안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혼자 힘으로 해내고 싶어 하는 이상한 욕심만 가득한 인간.’

이런 제가 자존감이 완전히 꺾이지 않고 나름의 소신을 지키면서 지금까지 지내올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었던 마음밭이 비교적 건강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건강한 마음밭을 가꿀 수 있도록 해주는 가족이 있었고,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가정의 울타리 밖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당연하게도 저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하지만 대학 입시에서 결국 현실의 벽에 부딪쳤을 때, 수시에서 고배를 마시고 정시에서 학교 하나만을 남겨두었던 저는 재수냐 진학이냐를 두고 가족들과 처음으로 언성을 높여가며 싸웠습니다. 가족들은 제게 더 좋은 기회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재수를 권했고,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재수 학원에 틀어박혀서 수능일 하루를 위해 또다시 1년을 살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진학을 원했습니다. 전공이 나와 맞는지 아닌지도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 아니냐는 이유를 들기도 하고, 내 시간을 몽땅 11월의 그 하루에 다 거는 짓을 더는 못한다는 마음으로 절규하다시피 저항했습니다. 사람의 실력이라는 것이 정말 입시의 결과와 상관없이 본인에게 남는 거라면 어떤 환경에서든지 그 실력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좋은 학교로 인정받는 대학에 진학하는 친구들, 혹은 원하는 목표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 재수를 결심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제 선택이 불안해 보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그 불안함과 두려움이 대학에서 첫 해를 보낼 때에도 계속 이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꽤 오래 걸렸지만—후회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차차 알게 되시겠지만요.




지금도 저는 제법 자유롭고 건강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운동만 조금 더 꾸준히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가볍게 걷는 것은 좋아하지만 원래 운동 자체를 그렇게까지 즐기는 편은 아니거든요.


아무튼! 저는 여전히 글을 쓰는 것을 즐기고, 서사가 담긴 작품이라면 책, 영화, 드라마 가리지 않고 즐겨 보고, 때로는 친구들과 또 때로는 혼자서 전시회를 보러 다닙니다. 가족들과 문화생활을 하는 것도 여전합니다. 그렇다고 놀기만 하는 건 아니고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것 또한 늘 안고 사는 숙제 중 하나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찾고, 더 공부하고 싶은 분야를 찾아나가는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늘 행복하기만 한 것은 아니지만 매일이 불행한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외로웠고, 다시 일어서기가 힘들 것 같았던 겨울을 보낸 후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앞으로 차근차근 기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마음을 담아,

2024.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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