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 vs 진학 | 좋아하는 것들이 내게 주었던 힘
입시가 끝난 직후의 겨울을 생각하면 작은 제 방에서 문을 등진 채 책상 앞에 앉아서 글을 써 내려갔던 것이 생각납니다. 밖에서는 잘 웃다가도 집에 들어와 혼자 방에 있는 시간이면 잘 울었습니다. 어떤 각도에서 보아도 스스로가 실패자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서. 그때의 제 방을 떠올리려고 하면 참 좁고 답답하며, 그 방 안에 가만히 앉아 있던 제 모습은 아주 작고 외롭습니다.
사실 처음에 수시에서 모두 떨어지고 정시를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는 재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더 컸던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전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기보다는, 주변에서 그것을 암묵적으로나마 원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인 줄로 알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재수 말고는 답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괴로웠습니다. 입시 결과는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데 수능을 위해서 1년을 더 사는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수시 입시가 끝난 직후까지만 해도 제 주변에서 재수가 아닌 다른 길에 대해서, 그러니까 ‘일단은 진학’의 가능성에 대해서 일말의 긍정적인 표현을 해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 길로 가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저는 마음 깊은 곳에서 조금 서글퍼했던 것 같습니다. 집안에서는 재수 쪽에 치우친 이야기만 듣다 보니 다른 방향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 무렵에 저를 오래 봐오신 한 분과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유일하게 저에게 재수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스스로의 내실을 믿는 것‘도 방법이라고. 저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 날이었고, 그날을 기점으로 제 인생이 또 한 번 바뀌었습니다. ‘스스로의 내실’이라는 말 앞에서, 그 내공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재수 학원이 저의 최선일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확고해졌으니까요. 부모님과 입장 차이가 극명해진 것도 이때 이후입니다. 2022년은 그렇게 저물어갔습니다. 그리고 연말, 저는 개인 블로그에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기게 됩니다.
해가 뜨기 전의 새벽이 가장 어두운 법이라는 말 이 있다.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견뎌내야만이 봄에 꽃이 피어날 수 있다고들 하고, 아프니까 청춘이라고들 하고, 온갖 그럴듯한 말로 현재의 고통을 정당화한다.
나는 여전히 불쑥 마음이 시리고 불현듯 눈물이 나고 보기보다 많이 불안하다.
위태롭다.
스스로를 혼자 둘 수가 없어서, 혼자 생각의 구렁텅이에 빠지다 보면 나는 또 눈 물에 젖어야만 해서, 그래서 한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몇몇 친구들에게 연말을 맞이해 편지를 써 내려간 것 외에는
스스로를 돌아보거나 하는 그 어떠한 글도 마음을 잡고 길게 써 내려갈 수 없었다.
애써 밖으로 돌아다녔고, 약속을 잡았고, 놀았다.
3년간 애쓴 우리들은 모두 그럴 자격이 있었다.
하지만 글을 잘 쓰지 않고 있다 보니 손이 무뎌지는 걸 느꼈고,
생각이 무뎌지는 것만 같았고,
그래서 더는 미룰 수 없게 되었다.
혼자 있지 않을 때는 밝을 수 있었다.
가족들 앞이 아닐 때도 밝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어떤 날들은 정말 괜찮았다.
매일을 울 필요는 없었고,
매일을 아파할 이유도 없었다.
객관적인 모든 수치로 내가 스스로의 가치를 입증해내지 못했던 것에 대해 나는 변명할 여지가 없으나,
내가 거쳐온 모든 과정들이 그 순간순간의 최선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
내 마음은 ‘내실’이라는 단어에 박혔다.
나는 단단한 사람이었나 생각해 본다면,
최소한 물러터진 사람은 아니었고,
똑똑한 학생이었나 생각해 본다면,
최소한 ‘진짜 공부’의 맛을 아주 조금은 보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학에서 기대하는 배움은 오로지 매년 11월의 그 하루를 위해 하는 공부와는 사뭇 달랐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있었고,
그걸 아직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
내가 유일하게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비록 사회에서 ‘좋다’고 평가하는 학교에 가는 많은 이들이 성실하게, 열심히 노력해 온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 ‘좋은’ 학교의 기준치에 미치지 못한 사람들이 전부 성실하지 않았다거나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과,
대학의 간판이 좋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도 늘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라는 것과,
고작 대학의 이름이 한 사람의 잠재력과 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이 글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나는 고유하다.
절망하지 않는다.
울지언정 털고 일어날 테고, 고통은 고통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오만하지 않겠다.
나는 그렇게 살아내야겠다.
(…)
나는 아직 나를 포기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 그가 자신을 믿지 않고 남을 신뢰하게 된 것은 자기를 믿고 삶을 개척해 나간다는 것이 너무나 어렵기 때문이었다. 우선 자기를 믿는다면, 모든 문제는 언제나 안이한 쾌락만을 찾는 동물적인 자아가 아닌, 이와는 반대의 측면에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데 타인을 믿는다면 그가 해결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게 다 해결되어 있었다.
(…) 이를테면 네흘류도프가 신이라든가 진리, 부, 가난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읽거나 말하면 주위 사람들은 이를 당찮게, 사리에 맞지 않은 웃음거리로 여겼다.
(…) 마찬가지로 네흘류도프가 성년이 되어 토지 사유는 부당하다고 생각하고 부친의 유산으로 물려받은 약간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때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식구들은 놀라워했고, 친척들의 조소와 비난이 따랐다. (…) 한편 네흘류도프가 근위대에 들어가 명문가의 동료들과 함께 낭비를 한다든가 도박으로 돈을 날려 얼만큼의 돈을 꺼내야 할 경우에도 어머니, 옐레나 이바노브나 공작 부인은 이런 것은 상류 사회의 젊은이들이 당연히 경험하게 되는 홍역쯤으로 생각하여 조금도 탓하지 않았다.
처음 얼마 동안 네흘류도프는 이에 맞서보았지만, 이 투쟁은 그에겐 너무 무리였다. 네흘류도프가 선이라고 믿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겐 악으로 보였고 이와는 반대로 악이라고 믿었던 것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선으로 취급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 투쟁에서 네흘류도프는 졌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를 믿는 대신 남을 믿게 되었다.
레프 톨스토이, <부활 1>
새해가 되었고, 수험생이었던 시간 동안 읽지 못했던 책이나 실컷 읽자고 생각했습니다. 러시아 문학에 도전해 보자는 마음으로 톨스토이의 <부활>을 집어 들었습니다. 마음이 맞는 친구와 북카페를 방문해서 책을 읽기도 하고, 혼자 방에 틀어박혀서 읽기도 했죠. 재수와 진학 사이에서 계속 고민하면서 정시 선발 결과를 기다리던 시기에 독서는 저에게 몇 안 되는 도피처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하필 이 시기에 읽었던 책이 <부활>이라서—처음에는 등장인물의 이름이 길고 발음하기도 어려워 책을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닐까 살짝 후회할 뻔도 했지만, 결국 제가 ‘실패’를 딛고 재도약하기를 꿈꿀 수 있게 해 준 발판이 되어준 책이 이 책이라는 점에서 애정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입니다.
위에 제가 인용한 부분은 <부활>을 읽으면서 작품 전체를 통틀어 제가 제일 좋아했던 부분입니다. 이해할 수 없었던 주인공의 행동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끔 서술되어 있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공 네흘류도프가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했던 가치가 타인의 시선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의식하다가 점점 망가져갔던 과정이 담겨 있어서, 이 책을 한창 읽고 있었던 그때의 저로서는 ‘줏대 있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돌아보게 되는 기회가 되었던 것이었죠. 타인을 과하게 의식하게 되는 순간, 인간은 어디까지 무너질 수 있는 것인지. ‘그리하여 그는 자기를 믿는 대신 남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어쩐지 너무 씁쓸했습니다.
주인공의 이야기에 제 모습을 투영해서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물론 제가 처한 상황은 선악의 문제를 다루어야 하는 영역은 아니었지만, 스스로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을 지킬지 타인의 시선 앞에 무릎을 꿇을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에서 네흘류도프의 과거 상황과 제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다짐을 했습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선택을 하기로, 남을 믿는 대신 스스로를 믿기로.
나는 억지로 해야 하는 일들에 타협하여 순응하지 못한다. 예전에도 그랬고, 18년을 그렇게 살아왔다면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우스워 보일지라도 나는 내 1년을, 두 번째로 주어진 나의 열아홉을, 그렇게 마냥 썩히고 틀에 가둬놓을 수는 없다. 명문 대학 간판을 받냐 못 받냐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나에게 그것이 절대적인 1순위였던 적은 없었다. 나에게는 나의 내실이 더 중요하다. 나는, 후회를 하더라도 오롯이 나의 의사에 의한 결정으로 인해 아프고 싶고, 성취를 하더라도 오롯이 나의 의사로 선택한 길을 통해 하고 싶다. 그 과정에서 기도가 필요하고, 용기가 필요하고, 끈기와 절제 또한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해내고 싶다. 내가 맞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네흘류도프처럼 줏대 없이 흔들려서, 과도하게 주변인들의 시선에 짓밟히고, 부당함을 수용해 버려서 내 선택이 타인의 말에 영향을 받고 결국 내 삶까지 타인의 입김으로 바뀌게 되는, 그런 인생을 살고 싶지는 않다. 포기할 수 없다. 끝끝내 그럴 것이다.
2023.01.05-06
물론, 다짐 한 번 했다고 늘 그 마음을 흔들림 없이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부지게, 라는 말이 싫어졌다. 정말로 싫어졌다.
1년 내내 좇던 말이었고, 좋아하던 말이었는데,
정말 온 마음을 다해 싫어하게 되었다.
나는 부단히도 사랑했고, 부단히도 성실했다. 내 3년은 그랬다. 자부할 수 있어.
그렇지만 그런 건, 나만의 3년간 내가 겪은 감정의 소용돌이 같은 것들은 모두 숫자로도, 그 어떤 객관적인 지표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 탓이다.
내가 순응하지 못해서, 내가 견디지 못해서, 내가 받아들이지 못해서.
우유부단한 걸까. 여전히 내 마음 갈피는 오락가락하는 걸 보면.
어디에라도, 누구에게라도, 무엇이라도 말하고 싶은데
나조차도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말이 안 나온다.
네 계획이 뭔데,
머릿속에 추상적인 그림은 있는데 그려지지를 않는다.
더욱이 요즘은 말로 이야기하는 것보다 문자, 글을 활용하는 것이 더 편해서.
2023.01.08.
가족들은 재수를 하기로 결정한 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대단하다’ 라거나 ‘다부지다’라는 말을 참 많이 했습니다. 저도 고3 1년을 보내면서 ‘다부지다’라는 말을 참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벅찬 일을 견디어 낼 만큼 굳세고 야무지다’와 같은 뜻을 가진 이 말은 어쩐지 단단하고 또 든든한 표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그 다부지다는 표현이 재수를 선택하는 친구들에게는 쓰이면서 저에게는 적용되지 않을 때마다, 그 단어를 점점 싫어하게 됐습니다. 가족들 앞에서 재수를 하는 제 친구들의 선택은 ‘대단’했고 (물론 그것이 어려운 결정인 만큼이나 대단한 선택이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 선택은 나약한 선택이 되었습니다. 나도 쉬운 마음으로 결정하는 게 아닌데. 다만 더는 스스로의 시간을 수능에다 버리고 싶지 않고, 일단 대학 진학을 시작으로 공부를 더 하고 싶은 분야를 찾고 스스로의 길을 개척해 나가겠다는 건데. 특목고를 졸업하는 내 입장에서는 차라리 재수를 선택하면 명예로운 재도전처럼 보이기라도 하지, 이쪽은 어찌 보면 훨씬 더 어려운 선택인데도. 국제고에 합격했을 때와 달리, 정시로 지원한 그 어떤 학교에 붙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부모님의 자랑이 될 수는 없을 것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도 저에게 어울리는 도전의 방식은 재수 학원에서 1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일단 주어진 환경에서 스스로만의 방식으로 길을 찾아나가는 것이리라는 믿음 하나로 감히 고집을 부렸고, 기꺼이 싸웠습니다.
어려서부터 저는 ‘이거 사달라’, ’저거 먹고 싶다‘하는 것들로 떼를 쓸 때가—없지는 않았겠지만—아주 많지는 않았습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상당히 순종적인 딸이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살면서 처음으로 언성을 높여 가면서 제 주장을 지키려고 했을 때가 대학 입시를 마쳤을 무렵이었습니다. 한바탕 울고 소리치며 난리를 친 끝에 정시 결과가 나왔고, 처음 고3을 시작할 때 꿈꾸던 것과는 너무 다른 결과물을 손에 쥐게 되었지만 합격한 곳이 한 군데라도 있는 이상 진학을 하겠다는 제 뜻이 가족들에게 결국 받아들여져 저의 대학 진학이 결정되었습니다. 때로는 고집도 필요하다는 것,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어서 굽히지 않는 것이 결정적으로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그때 배웠습니다.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저도, 가족들도.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래에는 재수와 진학 사이에서 고민하던 당시에 읽었던 또 하나의 책과 남겨둔 감상평의 일부를 덧붙입니다.
이 학교에서 자기가 하버드에 가지 못한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학생은 여럿이지. 하지만 난 그 사실이 괜찮은 유일한 학생이었어. 여기서는 모두가 가장 위대한 입시 스토리를 쓰기 위해 노력하지만, 난 위대한 스토리 말고 그냥 스토리를 쓰고 싶었어. 아마 그래서 내가 안 되는 건가 봐.
(…) 어쩌면 우리의 절박함이 진짜 새장일 수도 있어.
(…) 그냥 내가 한 선택의 이유에 대해 아빠가 몰랐으면 좋겠어. 엄마도 물론이고……. 사실 나도 잘 모르겠는 걸.
무엇이든 알게 되는 순간, 너무 마음 아프잖아.
-구하비, <하버드 22학번>-
*책에 대한 일부 스포일러 포함.
사실 책을 읽으면서 단테가 나랑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라는 것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영문학 공부를 하고 싶어 하는, 책이 좋은 아이. 그랬던 단테가 학업에 대한 스트레스로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나는 감히 그 아이를 비난할 수 없었다. 그 소중한 생명을 왜 그렇게 아깝게 버렸느냐고 할 수 없었다. 그 애의 고뇌에서, 그 한구석에서 내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책을 읽어나가면서 단테의 선택이 너무 모순적이지는 않은가, 생각하기도 했다. 자신은 하버드가 1순위가 아니었다면서, 같은 학교 학생들 중에서 하버드에 가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유일하게 괜찮은 사람이 자신이었던 것 같다고 하비에게 남긴 편지에는 그렇게 써두었으면서, 결국 그 애가 선택한 것은 성적에 대한 압박과 스트레스로 인한 죽음이었다니. 하지만 그 모순이 그 애의 선택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곧이어 깨달았던 것 같다. 그 말도 안 되는 모순이, 이유가 될 수 있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논리로 설명이 되지 않는, 오로지 경험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도 안 되는 모순이 단테의 선택의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이해한 순간, 나는 결코 스스로의 삶을 내 손으로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던 것 같다.
(…) 그래서 단테가 자기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어려웠을 선택을 내렸을 때, 내 마음은 너무 아팠다.
안단테. 느리게 연주하라는 뜻이다. 내 속도를 남들이 이해할 수 없다면, 나라도 내 속도를 이해해줘야 하는 것 아닐까.
2023.01.16.
Epilogue.
어려서도 엄마 손을 잡고 전시회에 가는 일이 즐거웠지만, 본격적으로 친구들과 혹은 혼자서 전시회를 보러 다니기 시작한 것은 대학 입시를 마무리 지은 이후입니다. 책을 읽는 것이 잠시 현실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부터 벗어나 숨을 돌릴 수 있게 해 주었던 것처럼, 전시회를 보러 다니는 것도 제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했던 몇 안 되는 활동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입시가 마무리되었을 즈음에는 성수동에 있는 한 전시장에서 나탈리 카르푸셴코라는 사진가의 작품들을 전시한 사진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자연에 대해, 지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참 아름다운 전시였습니다. 두 명의 고등학교 친구들과 방문했던 그 전시회에서 저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당신의 시선을 통해 세상에 보여주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재능을 존중하지 않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자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그 말이 참 와닿았던 시기였고, 일 년 반도 넘은 시간이 지나 다시 보아도 여전히 와닿는 말입니다. 아마 2023년을 시작하면서 지금 재학 중인 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재수를 하기를 선택했다면, 제 성격에 그 세계에 적응할 수 있었을지도 불분명하거니와 지금 제가 사랑하는 것들을 많이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는 합니다. 취미 생활도, 꿈도, 따뜻한 마음 같은 것도. 제 안에 어디가 망가졌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망가지지는 않은 채로, 그래도 저만의 방식으로 잘 살아내고 있다고—그것만은 자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입시판을 견디고 있는 모든 분들을 응원합니다.
당신의 모든 선택을 응원합니다.
마음을 담아,
202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