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예린 Oct 12. 2024

숫자 너머의 명랑한 마음을 위하여 (2)

못 다한 고백


얼마 전, 만 스무 살 생일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만 나이로도 반박의 여지가 없는 이십 대가 된다는 생각에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싱숭생숭했죠.


부끄럽지만 저는 종종 제가 다 자란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했습니다. 어른스럽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고, 생각이 깊다거나 성숙하다는 말은 하도 많이 들었던 이야기라 이상할 것도 없었죠. 하지만 이제 정말, 진짜, 빼도 박도 못하는 이십 대가 시작되고 나니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릴 때는 스무 살 정도면 다 큰 어른으로 보였고, 나의 이십 대라는 것은 너무 먼 일처럼 느껴졌는데도 눈 깜짝할 사이에 머나먼 미래가 저의 현실이 되어버린 것이죠.


만 나이로 열여덟, 한국 나이로 열아홉이었던 수험생. 그때의 저는 지금보다도 더 많은 것들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어렴풋이 현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늘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학종의 기본은 그 대학에서 제시하는 인성, 자기주도 학습 능력과 같은 역량이 아니라 명확한 상위권의 내신 성적이라는 것까지도 그때의 저는 잘 몰랐습니다.


그리고 또 몰랐습니다. 당시 저희 학교에서 암묵적으로 제시하던 대학 라인의 마지노선에 못 미친다고 해서 인생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아무도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그때 그곳에서 그 시기를 살아내고 있었던 저에게는 학교에서 숨 쉬는 공기가 그런 압박을 머금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거든요. 그렇게 간판이 한 사람의 인생의 성패를 판단할 기준이 못 된다는 것을 제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실은 아주 오만한 사람이었다는 것도. 타인의 오만에 상처받고 살았으면서도 저 또한 오만의 굴레에 빠져서 살고 있었음을 몰랐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특목고인데, 그 안에서의 분위기에 발맞춰 ‘최소한‘의 이름값은 할 학교에 가고 싶었고, 그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당당한 졸업생이고 싶었던 저는 단순한 숫자로 나타나는 지표를 넘어 제가 성실하게 보내온 시간과 구축해 온 스스로만의 이야기가 입시판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대학 입시 결과만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은 오판이었죠.


사실 흔들린 적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야. 어떻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겠어. 순간순간 숨이 막힐 때도 있었고, 모든 게 끝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어.
(…)
마지막 시험을 준비하면서 그런 생각들을 했어. 내가 목동, 대치동에 있는 학원을 다녔으면 뭐가 좀 달랐을까 하는. 진작 사교육 좀 받았더라면 내 내신이 지금보다 더 좋았을까, 그랬으면 고민이 좀 더 적었을까 하는 그런 생각들. 수학 과외를 받긴 했지만 줌으로 진행했던 과외 시간은 일주일에 2시간 정도면 충분했었으니까, 그냥 학교 친구들이 다니는 학원을 나도 다녔으면 내가 지금 조금 더 만족하는 성적을 받았을까. 그런 생각 끝에 내가 그렇다면 학원을 선택하지 않은 나의 선택들을 후회하는 것인지 생각해 봤는데,
아니. 후회하지 않아.
(…)
정형화된 틀 안에 갇히지 않아서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것들이 생겼어. 내가 잘하던 것들을 지켜낼 수 있었고, 건강한 마인드를 지켜낼 수 있었고. 난 내가 뭘 잘하는지 알고, 잘하는 것에 대해서 굳이 지나치게 낮출 필요가 없다는 것도 특히 작년을 거쳐오면서 뼈저리게 느꼈어. 교만한 거랑 자존감이 높은 건 다르다는 거.
무엇보다도 끝까지 성적이 올라간 과목들이 그래도 있다는 건 내가 외부 도움 없이 스스로 해낸 거니까, 그 성취감을 어떻게 따로 표현할 수가 없는 것 같아.
(…)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겼고, 잘 해내고 싶은 욕심이 생겼어. 꿈도 하나 더 생겼는데, 꼭 내 목표의 정점까지 도달해서 후배들한테 좋은 말 많이 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 박수받고 싶은 거 아니야. 그냥 내 행보가 선한 영향력을 발휘했으면 싶어. 나는 내가 잘 됐으면 좋겠고, 네가 잘 됐으면 좋겠고, 우리가 잘 됐으면 좋겠어.

2022.07.05. instagram
위에 인용격으로 첨부한 글은 이 사진과 함께 제 인스타그램에 게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 몰랐습니다. 대학 입시가 마무리된 뒤 제가 가족과 대립하면서까지 재도전 한 번 없이 입시판이 제게 건넨 그 고배를 마시겠다고 싸우게 될 줄 몰랐고, 아빠와 그렇게 언성을 높여가며 언쟁을 벌일 수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저에게 관심조차 없는 줄 알았던 3학년 주임 선생님이 졸업식 날 저더러 같이 사진 찍자고 하실 줄은 더더욱 몰랐고, 기숙사 짐을 가지고 함께 이동 중이었던 부모님께 진심으로 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기대 없이 시작한 대학 생활에서 좋아하고 또 존경하는 교수님이 생길 것이라는 것도, 동기들과 친해질 수 있으리라는 것도,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고려 대상이 아니었던 예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될 것이라는 것도. 저는 이 모든 것 중 어느 것 하나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한 치 앞을 몰라서 삶은 더 박진감 넘치는 생생한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이렇게 대학에서의 네 번째 학기에 접어들면서 제가 고등학교 때의 이야기들을 다시 끄집어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었습니다. 솔직해질까요. 이게 무슨 사서 고생하는 짓입니까. 좋았던 기억만 있는 시기도 아니고,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그 나이에 누구나 감당하는 크기의—그러나 당시에는 너무 버겁게만 느껴졌던—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했던 시기였는데. 그런 이야기를 안 그래도 바빠 죽겠다 싶은 2학년 2학기에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부랴부랴 써 내려가며 고쳐 가며 마감하는 경험이 참, 새롭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굳이 고등학교 때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가는 이유는—아이러니하게도 제가 조용히, 그러나 처절하게 무너졌던 만큼, 그 이상으로 치열하게 그 시기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는, 그 당시 애쓰면서 버텼던 스스로에 대한 애틋함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마음을 나누고 꿈을 솔직하게 공유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들을 여전히 많이 아낀다는 것. 인원은 많지 않을지언정 유능하고 빛났던 저의 동기들이 같은 학교에서 3년을 함께 보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때 우리가 서로 알았거나 몰랐거나, 좋았거나 미웠거나 잘 지내기를 바란다는 것. 이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계속 키보드 앞에 앉습니다. 아무리 입시판이 전쟁터라고 해도, 각박하다고 해도, 한 사람이 품고 있는 마음의 온기가 끝내 이길 수 있다고 믿는 저는 수험생이었을 때나 지금이나 어쩌면 이상주의자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글을 씁니다. 그 이상을 현실에 뿌리내리고 싶어서. 매일같이 마주하는 사람들이나,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나,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품고 있는 기억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살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아니까요.




다시 고3 이야기로 잠깐 돌아와 볼까요.

고3은 반쯤 정신이 나가있는 시기라고들 하죠. 모두가 미쳐 있어서 아무도 미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있었더랬습니다. 당시의 저에게도 광기 아닌 광기처럼 열심이었던, 고3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미친 짓’이 하나 있었는데, 수요조사를 한 뒤 긍정적인 의사를 표시한 친구들이나 친한 언니동생들에게 일주일에 한두 번씩 편지를 써서 보내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편지지에 직접 써서 우편으로 부치는 것이야말로 가장 광기 어린 짓이었겠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있었나 봅니다. 저는 문자로 예약 전송을 했으니까요. 아무튼 다정함, 사랑, 응원. 그런 단어들에 꽂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갑자기 편지라니 뜬금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줄 압니다. 애초에 이 편지 쓰기 이벤트를 시작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저에게는 스트레스를 풀기에 글쓰기가 제격이었기 때문이고, 두 번째 이유는 학생 때부터(따지고 보면 지금도 학생이기는 하지만) 계속해서 지향해 왔던 ‘선한 영향력’과 직결됩니다.


그해 여름에는 교회에서 충청북도 단양으로 여름 수련회를 떠났습니다. 고3들은 그러기가 참 쉽지 않은데도 제 친구들은 대부분 다 참여했던 수련회였습니다. 아마 편지를 써야겠다는 아이디어는 수련회 이후에 제 머릿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대학 원서를 쓰기 전에 진로에 대한 고민을 지속해 나가면서 저는 ‘언어’라는 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저의 언어로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고3이었던 친구들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죠. 저도 평탄하고 행복하게만 지내고 있지는 않았으면서도 친구들이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 편지들은 평소에 바빠서 연락하기 힘든 친구들에게 연락이 닿을 수 있는 소통의 창구이기도 했고, 정말 마음이 힘들었던 누군가에게로부터 위로가 됐다고 고맙다고 인사하는 답장을 선물해주기도 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친구들부터 동네 친구들, 교회 친구들까지. 다만 고등학교 친구들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같은 학교생활 반경 안에 있는 친구들에게 입시를 치르고 있던 당시에 솔직하게 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으니까요.


아래 내용을 보면 그 심정이 조금 더 이해가 가실까요.

오늘은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했습니다. 금요일에 잡기를 얼마나 잘했는지 모릅니다. 그냥, 여러 가지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음, 어느 대학에도 못 갈 것 같다는 불안감은 아니었습니다. 앞선 편지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어느 대학을 가든 그 대학을 빛내줄 자신이 있고, 내가 더 큰 배움의 장에 나아가는 데 있어서 열등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니까요. 솔직히 자소서를 쓰면서는 정말 자신이 있었습니다. 바보 같은 망상. 붙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거든요.
하지만 현실에서는 내가 서 있는 자리가 그리 안정적인 위치는 아닙니다. 모의고사 점수도 아직 충분치 않습니다. 나는, 그리고 나를 잘 아는 주변 사람들은 나를 낮게 평가하지 않지만, 대학에서는 낮게 평가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상담을 하면서 들은 현실적인 이야기들을 예상이야 했습니다만, 정말 내가 이럴 거면 3학년 1학기 학교 내신까지 왜 그렇게 붙잡고 있었나 싶었습니다. 지극히 성실하고자 노력했는데. 3학년 1학기 성적은 꽤 많이 올랐지만, 어쨌든 3년 간의 종합적인 내신 평점은 결국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거든요. 그게 결국 내 발목을 잡는 것 같았습니다.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배신감이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객관적인 성적의 지표가 다 드러내지는 않더라도, 나는 학교에서의 배움을 사랑했고, 능동적으로 탐구했고, 성실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고작 숫자 하나, 소수점 하나에 밀려야만 하는 것이 화가 났고, 한 순간 한 순간에 진심이었던 내 마음이 너무 허무하게 흩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2022.08.19. 편지


편지를 쓰면서는 그동안 읽었던 책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발견한 좋은 문구 같은 것들을 레퍼런스 삼아 활용하고는 했습니다. 가령 이런 것이었죠:


“신체적인 특징들이건 더 내면적인 것이건, 그가 갖고 있는 무언가를 사랑하는 게 아니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합니다.”

-장뤼크 낭시, <신, 정의, 사랑, 아름다움> 중에서.-


당시 읽었던 정여울 작가의 책에서 소개한 구절입니다. 이 문장들은 향후 제가 삶의 방향키를 잡을 때, 사람을 대할 때 가지는 마인드셋의 기반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고등학생 시절에 줄 세우기식 입시 제도에 저항하다시피 하며 읽었던 책들은 지금의 제 모습을 만들어주는 데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소 가운데 하나라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수능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수능은 이제껏 본 모의고사보다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흔히들 말하는 ‘한 문제 차이로 등급이 달라지는 ‘ 경험을 저 또한 했습니다. 인강 사이트에 돌린 가채점 결과와 성적표에 찍혀 나온 결과는 최종적으로 조금 달라져 있었고, 결국에는 논술 최저를 맞추지 못했습니다.

수시 이야기도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 여섯 개의 학교 중 단 한 곳에서도 합격 통지를 받지 못했고, 정시로 지원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선택지 앞에서 저는 지원은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정시 이야기도 길 것 없습니다. 성적에 맞춰보려니 그래도 서울 안에 있는 학교에 원서를 넣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무조건적인 안정권 하나, 예비로 붙을 수 있을 것 같았던 곳 하나, 많이 상향지원한 곳 하나를 썼을 때도 이미 수시에 지원할 때에 비해서는 흔히 말하는 학교 ‘레벨’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 세 개의 학교 중에서도 안정권이었던 학교 한 곳을 제외하고는 죄다 불합. 그러니까 저는 수시와 정시를 합쳐 9개의 학교 중 단 한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떨어졌습니다.


그 고배를 들이켜기로 마음먹었을 때의 저는 이전까지의 저와는 같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추신:

졸업식 날 받았던 다섯 통의 편지입니다. 저는 편지 한 통 쓰지 못했던 겨울이었는데, 받기는 다섯 통이나 받았으니 내심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이때 편지를 주었던 친구들 중에서 두 명과는 아예 연락을 안 한지 1년이 넘었고, 두 명과는 가끔 연락을 하고, 한 명과는 지금까지도 틈이 날 때 만나며 잘 지냅니다. 그래도 저는 졸업식날 받았던 다섯 통의 편지를 마음 한편에 품고서 살고 있습니다. 받은 다정함을 안고서 언젠가는 어떻게든, 그게 오늘이든 내일이든 몇 년 뒤가 되었든, 제가 쥐고 있는 온기 어린 마음 한 움큼도 그들에게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24.10.12.

마음을 담아.



이전 06화 [특별편] 이런저런 마음을 모아둔 나의 은하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