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는 것 vs 해야만 하는 것

국가R&D의 선택

지난 주, 염한웅 포스텍 교수의 인터뷰를 읽으며 가슴이 답답했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 진보·보수 정부를 모두 경험한 그가 던진 한 마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선택과 집중 전략을 폐기해야 한다."


300억원짜리 고철이 된 꿈

포항 가속기연구소에는 EUV 가속기라는 게 있다. 초정밀 반도체 제조에 필요하다며 300억원을 들여 만든 거대한 장비다. 염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 창문으로 그것을 매일 본다고 했다. 작동조차 못 하는 채로.

"한국엔 EUV 부품을 만들 기업도 거의 없는데 예산을 투입한 겁니다."

2조원 가까이 들어간 중이온 가속기는 더 참담했다. "거의 재앙 수준"이라는 그의 표현이 과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왜 반복될까? 정부가 세계 1등을 만들겠다고 나서고, 관료들이 '할 수 있어 보이는' 기술을 골라 거액을 투입하지만, 결국 남는 건 고가의 고철뿐이다.


추격자는 영원히 추격자다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방식을 돌이켜보자. 미국이나 중국이 잘하는 기술 중에서 몇 개를 골라 열심히 따라잡자는 게 소위 '선택과 집중' 전략이었다. 문제는 이 방식으로는 영원히 2등밖에 될 수 없다는 점이다. 남들이 이미 만든 길을 따라가는 한, 우리는 계속 추격자일 뿐이다. 더 심각한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위주로 선택한다는 점이다. 현재 역량으로 달성 가능해 보이는, 안전한 목표들만 고른다. 실패하면 책임져야 하는 관료들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지만, 이런 식으로는 혁신은 꿈도 꾸기 어렵다.


유럽이 다른 이유

염 교수가 EU의 사례를 언급한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유럽연합은 과학기술 정책의 목표를 이렇게 제시했다고 한다:

수준 높은 기초 연구

인류 대전환에 필요한 공공기술

유럽 산업의 미래 경쟁력을 위한 과학기술

특히 세 번째가 핵심이다. 우리가 "당장 급한 먹거리"에 투자할 때, EU는 "미래에 나올 산업의 기초 과학기술"에 투자한다는 점에서 근본적 차이가 있다.


CAN DO에서 MUST DO로

최근 한 전문가와 나눈 대화에서 명쾌한 해답을 들었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은 현재의 역량으로 '할 수 있는 것(CAN DO)' 보다는 '국가적으로 해야만 하는 것(MUST DO)'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순간 뭔가 딱 맞아떨어지는 느낌이었다.

CAN DO는 안전하다. 실패 확률이 낮고, 예측 가능하며, 책임 추궁도 피할 수 있다. 하지만 혁신과는 거리가 멀다. MUST DO는 다르다. 2030년 탄소중립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기술, 팬데믹에 대비해 꼭 필요한 백신 플랫폼, 디지털 주권을 지키기 위한 핵심 기술들. 이런 것들은 어렵더라도, 위험하더라도 해야만 한다.


관리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문제는 기술 선정만이 아니다. 사업과 과제를 관리하는 방식 자체가 CAN DO에 최적화되어 있다.

현재 시스템은 이렇다:

달성 가능한 수준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정량적 지표로 성과를 측정하며

예산 집행률을 중시하고

검증된 연구진만 선택한다

이걸 MUST DO 방식으로 바꾸면:

국가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를 목표로 설정하고

문제 해결 기여도와 실패로부터의 학습을 평가하며

마일스톤 기반으로 적응적 투자를 하고

도전 의지와 학습 능력을 중시한다


AI가 도울 수 있는 일

흥미롭게도 이런 패러다임 전환에서 생성형 AI가 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MUST DO 기술을 체계적으로 발굴하는 일부터가 그렇다. 다양한 미래 시나리오를 분석하고, 각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기술들을 도출하는 작업. 사람만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AI의 도움을 받으면 훨씬 체계적이고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과제 관리도 마찬가지다. 연구 진행 상황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MUST DO 목표 달성을 위한 최적 경로를 제안하는 지능형 시스템. 관료의 자의적 판단보다는 데이터에 기반한 합리적 의사결정이 가능해질 것이다.


달에 가는 이유

염 교수가 우주 발사체 얘기를 하면서 한 말이 생각난다.

"달에 가서 뭘 연구할 거냐고 물어보면 헬륨-3 같은 자원을 가져오겠다고 해요. 상업적으로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왜 달에 가려고 할까? 미국이 가니까? 중국이 가니까? 그래서 우리도 갈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이게 바로 CAN DO 사고의 전형이다. 남들이 하는 걸 우리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따라 하는 것.

하지만 MUST DO 관점에서 보면 질문이 달라진다. 우리가 달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달에 가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는 우리만의 문제가 있는가?


작은 변화, 큰 전환

사실 이 변화는 그리 거창한 게 아닐 수도 있다.

회의실에서 "이 기술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대신 "이 문제 우리가 해결해야 할까요?"라고 묻는 것.

"3년 안에 80% 성능 달성 가능합니다"라고 보고하는 대신 "2030년 탄소중립을 위해 이 기술이 반드시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것.

실패한 과제에 대해 "예산을 낭비했다"고 비난하는 대신 "무엇을 배웠는가"를 묻는 것.

작은 변화지만, 이런 것들이 모이면 큰 전환이 일어날 수 있다.


추격자에서 벗어나는 길

염 교수는 한국 사람들의 특별한 점을 언급했다.

"한국 사람은 누구나 과학기술이 잘돼야 국가가 잘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다른 나라에는 없는 우리의 장점이에요." 과학기술 입국. 우리 뇌리에 박혀 있는 이 무형자산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이제는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나라에서 해야만 하는 것을 하는 나라로. 추격하는 나라에서 길을 만드는 나라로. 안전한 2등에서 위험한 1등으로.

그 길의 시작은 간단하다. 다음 회의에서 이렇게 물어보는 것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기술이 뭐가 있죠?" 대신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뭐죠?"

300억원짜리 고철을 바라보며 염한웅 교수가 느꼈을 답답함을 우리 모두가 공유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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