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이 던지는 질문
작년 11월, 동영상 생성 AI로 주목받는 런웨이의 CEO 크리스토발 발렌수엘라가 X에 올린 한 줄이 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고 있다.
"런웨이는 AI 회사가 아니다. AI 기업의 시대는 끝났다."
처음 이 글을 봤을 때는 그저 기업 포지셔닝의 변화 정도로 여겼다. 하지만 R&D 전략을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이 발언이 단순한 마케팅 메시지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는 우리가 지금까지 해온 연구개발의 패러다임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발렌수엘라는 현재의 AI를 1839년 루이 다게르가 발명한 최초의 사진 현상 기술인 '다게레오타입'에 비유했다. 흥미로운 관점이다.
카메라가 처음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저 이미지를 포착하는 신기한 도구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카메라는 영화를 만들어냈고, 텔레비전을 탄생시켰으며, 지금은 틱톡과 인스타그램까지 만들어내는 거대한 산업 생태계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AI도 같은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한다. "AI는 전기나 인터넷만큼이나 기본적인 인프라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전기를 예로 들어보자. 에디슨이 전구를 발명했을 때, 사람들은 '전기 회사'라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하지만 전기가 보편화된 지금, 우리는 모든 회사를 '전기 회사'라고 부르지 않는다. 전기는 그냥 당연히 있는 인프라일 뿐이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을 기획하고 평가하는 일을 하면서 자주 보게 되는 현상이 있다. 여전히 많은 연구 과제들이 'AI 알고리즘 개발', '딥러닝 모델 성능 향상', 'GPU 최적화' 같은 기술 자체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연구들이 무의미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발렌수엘라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아직도 '전기를 어떻게 더 잘 만들까'에만 집중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정작 '전기로 무엇을 만들까'라는 질문은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최근 ChatGPT, 클로드, 제미니 같은 생성형 AI가 보편화되면서 실감하고 있다. 이제 누구나 AI를 사용할 수 있다. 코딩을 모르는 사람도 AI에게 물어보면서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디자인 경험이 없는 사람도 AI로 그럴듯한 이미지를 생성한다.
기술의 진입장벽이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중요한 건 무엇일까?
Technology Readiness Level(TRL)이라는 개념이 있다. 기술 성숙도를 9단계로 나누는 지표인데, 1-3단계는 기초연구, 4-6단계는 응용연구와 기술개발, 7-9단계는 실증과 상용화 단계다.
AI 기술은 이미 TRL 7-9 단계에 빠르게 진입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R&D 전략은 여전히 TRL 1-6 단계에 머물러 있는 건 아닐까?
프로젝트 관리 방법론 중 애자일(Agile)이라는 접근법이 있다. 빠르게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사용자 피드백을 받아서, 반복적으로 개선해나가는 방식이다. 최근 들어 R&D 프로젝트에도 애자일 방법론을 적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런데 애자일의 핵심은 '사용자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다. 기술적 완성도보다는 실제로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것,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을 우선한다. AI가 인프라가 되는 시대에는 이런 관점이 더욱 중요해진다.
"AI를 어떻게 만들까?"에서 "AI로 무엇을 만들까?"로. 질문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R&D 성과를 어떻게 측정해야 할까? 지금까지는 논문 몇 편 썼는지, 특허 몇 개 냈는지, 기술 완성도는 어느 정도인지가 주요 지표였다. 하지만 AI가 보편적 인프라가 되는 시대에는 이런 지표만으로 충분할까?
진짜 중요한 건 그 기술이 실제로 현장에서 얼마나 쓰이는지, 사람들의 문제를 얼마나 해결해주는지, 새로운 가치를 얼마나 창출하는지가 아닐까?
최근 의료 AI 분야의 사례를 보면 이런 변화가 실감난다. 예전에는 'MRI 영상에서 종양 검출 정확도 95% 달성'이 성과였다면, 지금은 '실제 병원에서 의사들이 얼마나 활용하고 있고, 진단 시간이 얼마나 단축되었으며, 환자 만족도는 어떻게 변했는지'가 더 중요한 지표가 되고 있다.
AI가 인프라가 된다면, 앞으로의 혁신은 AI와 다른 분야의 융합에서 나올 것이다. AI + 의료, AI + 제조, AI + 교육, AI + 농업... 무한한 조합이 가능하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히 AI 기술을 갖다 붙이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해당 분야의 도메인 지식과 현장 경험이 결합되어야 진짜 가치가 만들어진다.
예를 들어, 농업 AI를 개발한다면 컴퓨터 비전 알고리즘만으로는 부족하다. 농부들이 실제로 어떤 문제를 겪고 있는지, 농작물의 생육 과정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기존 농업 프로세스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기술 개발자와 현장 전문가의 협업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몇 가지 생각해볼 점들이 있다.
먼저, R&D 투자의 방향성을 재검토해야 한다. AI 기술 자체보다는 AI를 활용한 응용 서비스와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개발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할 것 같다.
둘째, 평가 체계도 바뀌어야 한다. 기술적 우수성과 함께 사회적 가치와 실용성을 균형 있게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지표들이 필요하다.
셋째, 빠른 프로토타이핑과 시장 검증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완벽한 기술을 만들어서 세상에 내놓기보다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실제 사용자들과 함께 개선해나가는 접근법이 중요해진다.
마지막으로, 융합형 인재 양성과 협업 체계 구축이 필요하다. 기술만 아는 사람도, 도메인만 아는 사람도 부족하다. 양쪽을 연결할 수 있는 사람들과 시스템이 필요하다.
전기가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그저 밤에도 불을 켤 수 있다는 것에 감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혁신은 전기가 보편화된 후에 일어났다. 공장의 자동화, 가전제품의 발달, 컴퓨터의 등장... 전기라는 인프라 위에 수많은 혁신이 꽃피웠다.
인터넷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연구기관끼리 정보를 주고받는 도구였지만, 보편화되면서 전자상거래, 소셜미디어, 온라인 교육, 원격근무 등 우리 삶 전체를 바꿔놓았다.
이제 AI가 그 지점에 서 있다. 특별한 기술에서 당연한 인프라로. 런웨이 CEO의 발언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작년 11월의 그 짧은 트윗이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AI 기업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은 AI의 실패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AI가 성공적으로 우리 삶의 인프라가 되었다는 의미다.
이제 중요한 건 그 인프라 위에서 무엇을 만들어낼 것인가다. 어떤 가치를 창출할 것인가다.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다.
R&D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기술 중심에서 가치 중심으로, 개발 중심에서 활용 중심으로, 완성도 중심에서 실용성 중심으로.
우리는 준비되어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이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