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현장에서 목격한 글로벌 기술 패권의 새로운 장
지난 주 수요일 오후, 회의실에서 나오던 중 휴대폰으로 받은 뉴스 알림 하나가 내 발걸음을 멈춰 세웠다. "트럼프, 미국 AI 행동계획 발표"라는 헤드라인이었다. 20년 넘게 국가연구개발사업 현장에서 일해온 내게는 단순한 뉴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지켜봐온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꿀 수 있는 선언문이었다.
연구실로 돌아와 관련 자료들을 하나씩 읽어가며, 나는 점점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기존의 정책 발표와는 차원이 달랐다.
30년 전, 내가 기계공학을 공부하던 시절 교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문득 떠올랐다. "기술은 도구가 아니라 권력이다." 당시에는 막연하게 들렸던 그 말이 이제야 생생하게 다가온다.
트럼프가 발표한 'AI 행동계획'을 찬찬히 분석해보니, 이것은 단순히 AI 기술을 개발하고 수출한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미국이 그리고 있는 것은 AI를 중심으로 한 완전히 새로운 세계 질서였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풀스택 패키지' 전략이었다. 기존에는 반도체는 반도체대로, 소프트웨어는 소프트웨어대로 개별적으로 수출하던 것을 이제는 하나의 통합된 생태계로 묶어서 제공한다는 것이다. 마치 레고 블록을 낱개로 파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성을 통째로 파는 것과 같다.
이 전략의 진짜 무서운 점은 기술적 완성도가 아니라 종속성의 완성에 있다. 한 번 이 생태계에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스마트폰 생태계에서 iOS와 안드로이드 사이를 옮겨다니기 어려운 것과 같은 이치다.
정부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부처 간 협력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각자의 이해관계와 업무 영역이 다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협력은 쉽지 않다.
그런데 이번 미국의 AI 행동계획에는 무려 12개의 연방 부처가 공동으로 서명했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가 총괄하고, 과학기술정책실과 에너지부가 기획을 주도하며, 국방부, 상무부, 국토안보부 등이 실행을 담당하는 구조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미국 정부 전체가 AI를 단순한 기술이 아닌 국가 생존의 핵심 인프라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과거 맨해튼 프로젝트나 아폴로 계획에 준하는 국가적 의지의 표현이다.
내가 진행하고 있는 연구개발사업들을 돌아보니, 우리도 부처 간 칸막이를 뛰어넘는 통합적 접근이 절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의 융합 속도가 가속화되는 시대에 여전히 부처별로 나뉘어 진행되는 R&D는 한계가 명확하다.
미국의 이번 계획에서 한국은 'NATO, 일본, 인도'와 함께 핵심 동맹국으로 분류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분명 좋은 소식이다. 최첨단 AI 기술에 대한 접근성이 크게 향상될 것이고, 글로벌 표준 설정 과정에서도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것이 진정한 파트너십일까, 아니면 고급스러운 형태의 기술 종속일까?
몇 년 전, 한 대기업 R&D 센터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 떠오른다. 그곳의 연구원이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가 개발하는 기술의 70%는 사실 외국 기술을 우리 환경에 맞게 응용하는 것입니다. 진짜 원천기술은 10%도 안 돼요."
그때는 그냥 넘어갔던 말이 이제는 무겁게 다가온다. 미국의 AI 풀스택 패키지에 의존하게 되면, 우리의 그 10%마저도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요즘 내가 가장 집중하고 있는 분야는 생성형 AI를 활용한 R&D 기획 효율화다. ChatGPT, Claude 같은 도구들이 연구 기획서 작성부터 기술 동향 분석까지 업무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얼마 전, AI를 활용해 연구 제안서를 작성해보는 실험을 해봤다. 기존에 며칠 걸리던 작업이 몇 시간 만에 완료되었다. 물론 아직 인간의 검토와 수정이 필수적이지만, 효율성의 향상은 분명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감도 든다. 이런 도구들이 대부분 미국 기업에서 개발된 것들이라는 점에서다. 우리가 연구 기획의 핵심 과정까지 외국 AI에 의존하게 된다면, 과연 독립적인 사고와 혁신이 가능할까?
미국의 AI 행동계획을 보면서, 이런 우려가 더욱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구축하려는 AI 생태계에 완전히 편입되면, 우리의 R&D 방향 자체가 미국의 기술 로드맵에 종속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떤 선택지가 있을까? 미국 진영에 완전히 편입되거나, 중국과의 관계를 고려해 애매한 중간 지대에 머물거나, 아니면 독자적인 길을 개척하거나.
내가 생각하는 답은 '선택적 협력과 독자적 혁신의 균형'이다. 단기적으로는 미국과의 기술 협력을 통해 격차를 줄이되, 중장기적으로는 우리만의 차별화된 AI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
예를 들어, K-팝이 전 세계를 휩쓸 수 있었던 이유는 서구의 음악 산업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면서도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적 요소를 결합했기 때문이다. AI 분야에서도 이런 접근이 가능하지 않을까?
한국의 강점인 제조업, 엔터테인먼트, 게임 산업과 AI 기술을 결합한 독특한 융합 모델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등 제3지역을 대상으로 한 'K-AI' 패키지를 개발해 수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전략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부족하다. AI 기술의 발전 속도가 워낙 빠르기 때문에 몇 년만 늦어도 따라잡기 어려운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
최근 프로젝트 관리 업무를 하면서 자주 인용하는 말이 있다. "완벽한 계획보다는 빠른 실행이 중요하다." Agile 방법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장기 계획이 아니라 지금 당장 실행할 수 있는 구체적인 액션 플랜이다. 범정부 AI R&D 통합 거버넌스 구축, 생성형 AI 기반 연구 기획 시스템 고도화, 독자적 AI 표준 개발 등을 단계별로 추진해야 한다.
트럼프의 AI 행동계획은 분명 우리에게 큰 도전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기존의 안주와 관성을 깨고 혁신적인 도약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20년 넘게 R&D 현장에서 일하면서 느낀 것은, 위기의식이 가장 강력한 혁신의 동력이라는 점이다. 외환위기 때 우리가 IT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도, 절체절명의 위기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냉정한 현실 인식과 함께 미래에 대한 확고한 비전이다. 미국의 AI 제국 건설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 우리만의 독특한 서핑 기술을 개발해야 할 때다.
변화의 물결에 휩쓸리지 않으면서도 그 에너지를 활용해 더 높이 도약하는 지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역량이 아닐까.
오늘도 연구실을 나서며, 내일의 R&D 전략 회의에서 이런 이야기들을 어떻게 풀어낼지 고민하고 있다. 기술의 진보는 멈추지 않고, 우리의 선택은 매일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