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측할 수 없는 가치
오늘 아침, 연구소 앞마당을 걸으며 문득 잡초들을 바라보았다. 어제 관리팀에서 제거했던 자리에 벌써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참 질긴 것들이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순간, 며칠 전 본 영상이 떠올랐다. 잡초의 생존 전략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신기했다.
도꼬마리라는 식물은 하나의 열매에 크기가 다른 두 개의 씨앗을 만든다고 했다. 그런데 이 씨앗들은 동시에 발아하지 않는다. 먼저 큰 씨앗이 세상에 나가서 탐색을 하고, 만약 그것이 실패하면 남아있던 작은 씨앗이 기회를 기다렸다가 싹을 틈튼다.
"아, 이거 우리가 하는 R&D 포트폴리오 관리랑 똑같네."
모든 예산을 한 번에 투입하지 않고 단계별로 검증하며 투자하는 것. 리스크를 분산시키는 것. 잡초가 이미 수백만 년 전부터 해온 일이었다.
더 놀라운 건 개구리밥이었다. 이 녀석은 아예 복잡한 씨앗 생산 과정을 무시해버린다. 엽상체에서 바로 새로운 개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마치 린 스타트업이 복잡한 기획 단계를 건너뛰고 MVP(Minimum Viable Product: 최소 기능 제품)로 바로 시장에 나가는 것 같았다. 완벽한 제품을 만들려고 오랜 시간을 들이는 대신, 핵심 기능만으로 빠르게 시작해서 피드백을 받으며 개선해나가는 방식 말이다.
그런데 잡초의 진짜 놀라운 점은 따로 있었다.
아무도 살 수 없는 척박한 땅, 오염된 토양에 가장 먼저 뿌리를 내린다는 것. 그리고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라 그 땅을 정화한다. 체내의 특수한 단백질로 중금속을 흡착하고, 오염 물질을 흡수해서 제거한다. 땅속 깊은 곳의 양분을 끌어올려 표토층을 기름지게 만들고, 다른 생명체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연구실로 돌아와 책상에 앉으니 갑자기 생각이 났다.
"기초연구가 바로 저런 잡초 같은 존재 아닐까?"
기초연구를 생각해보자.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미지의 영역에 가장 먼저 들어간다. 당장 뭔가 쓸모있어 보이지도 않고, 상업적 가치도 모호하다. 하지만 그 "척박한" 분야에서 묵묵히 뿌리를 내리며 후에 응용연구나 개발연구가 들어올 수 있는 토대를 만든다.
양자역학이 처음 나왔을 때 누가 그것이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기반이 될 거라고 생각했을까. DNA 구조를 밝혀낼 때 그것이 생명공학 혁명의 시작이 될 거라고 누가 예상했을까.
기초연구는 또 다른 역할도 한다. 기존 패러다임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실패한 연구들조차 다음 연구의 자양분이 된다. 마치 잡초가 죽어서도 유기물을 남겨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것처럼.
학문적 다양성을 유지하고, 연구생태계 전체의 건강성을 지켜나간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만 당장은 주목받지 못하는 일들을 묵묵히 해낸다.
잡초가 언제 어떤 환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기초연구도 마찬가지다. 언제 어떤 형태로 인류에게 도움이 될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씨앗"들이 언젠가는 꽃을 피울 거라는 점이다.
국가연구개발사업을 기획할 때마다 고민이 된다. 기초연구에 얼마나 투자해야 할까. 성과가 명확하지 않고, 당장의 사회적 요구에 직접 부응하지도 못하는 것 같은데.
하지만 오늘 잡초를 보며 깨달았다.
잡초가 없는 생태계는 메마르고 척박해진다. 기초연구가 없는 연구생태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당장은 쓸모없어 보여도, 연구생태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미래의 혁신을 준비하는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예산 삭감의 바람이 불어도 끈질기게 살아남는다. 다양한 분야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지식의 경계를 넓혀간다.
생성형 AI가 모든 걸 바꿔놓는다고 하지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기초연구라는 "잡초"의 가치일 것이다.
내일 다시 연구소 앞마당을 지날 때는 잡초들에게 고마움을 표해야겠다.
"너희들 덕분에 좋은 깨달음을 얻었어."
참고: 잡초의 생존 전략과 생태적 역할 (https://youtu.be/i9uUK99qo_c?si=LaEz_qLUM9FHE6t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