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록이 한국을 선택한 이유

1경 7천조원 자산운용사의 숨은 주역, 차지호 의원을 만나다

뉴스를 보다가 낯선 얼굴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재명 대통령이 유엔총회에서 블랙록 회장을 만났을 때, 그 옆에 서 있던 초선 의원. 정청래 의원은 그를 "당대표 체제의 숨은 주역"이라 불렀습니다.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의사에서 AI 전략가로


차지호 의원의 이력은 독특합니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했던 의사 출신. 그런 그가 왜 AI를 이야기하고, 국회의원이 되어 글로벌 투자 협상을 주도하게 된 걸까요. 그의 답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사회적 고통을 줄이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의사로서 사람을 치료하지만, 사회 시스템과 인프라가 사람들의 건강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AI 기술이 앞으로 사람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될 거라고 믿었습니다."


의사의 역할을 AI까지 확대한 셈입니다.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사회 전체의 시스템을 치유하겠다는 철학. 그게 그를 이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몇 달간의 물밑 협상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유엔총회 당시 갑자기 이루어진 만남이라고요. 하지만 진실은 달랐습니다.


"대선 때부터 글로벌 전략을 수립하면서, 중국과 미국에 비해 우리의 초격차를 절감했습니다. AI 전환에서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수십 배의 격차가 있었죠. 그래서 투자할 수 있고 시장을 열어줄 수 있는 글로벌 플레이어를 찾아 헤맸습니다."


몇 달간의 물밑 협상. 수많은 국제기관과의 협력 모색. 유엔총회는 그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을 뿐입니다. 화려한 무대 뒤에는 땀과 인내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블랙록, 그들은 누구인가


저는 솔직히 블랙록이라는 회사를 잘 몰랐습니다. 인터뷰를 보고 나서야 그 규모에 놀랐습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운용 자산 1경 7천조원. 삼성의 대주주이고,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의 대주주이기도 합니다. 엔비디아, 코어위브 같은 AI 기업들을 묶어 글로벌 AI 파트너십을 만들었습니다. 오픈AI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데이터센터를 만든 것도 바로 이들입니다.


한마디로, 전 세계 AI 인프라의 로드맵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플레이어입니다.


세 가지 약속


차 의원이 블랙록과 맺은 MOU의 내용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한국의 AI 데이터센터와 재생에너지 인프라에 투자하겠다는 것. 둘째,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한국을 AI 허브, 즉 AI 수도로 만들겠다는 것. 셋째, 블랙록이 주도하는 글로벌 AI 파트너십에 한국을 참여시키겠다는 것.


말로만 들으면 추상적입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구체적입니다.


두 개의 고속도로


차 의원이 협상 과정에서 강조한 것은 한국의 두 가지 전략이었다고 합니다. AI 고속도로와 에너지 고속도로.


"블랙록에게 이야기했습니다. 한국은 두 축의 전략을 가지고 있다고. 재생에너지와 AI, 이 둘이 우리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업이라고."


재밌는 점은 블랙록이 바로 이 두 분야 모두에 강점을 가진 회사라는 겁니다. ESG를 선도해온 자산운용사로서 재생에너지 투자 경험이 풍부하고, 동시에 AI 인프라를 글로벌하게 구축하고 있습니다. 퍼즐 조각이 딱 맞아떨어진 것이죠.


그리고 순서가 중요합니다. 재생에너지 인프라가 먼저 구축되고, 그 위에 AI 데이터센터가 올라갑니다. 왜냐하면 국제 표준상 AI 데이터센터는 클린 에너지로 운영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데이터센터를 짓는 시간보다 전력망을 만드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립니다.


하이퍼스케일, 생존의 조건


차 의원은 단호했습니다.


"하이퍼스케일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게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필수 조건입니다."


하이퍼스케일러.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아마존 같은 초대규모 클라우드 서비스 제공자를 말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GPU 5만 장을 야심차게 이야기했지만, 하이퍼스케일은 수십만 장 단위입니다.


ChatGPT 같은 초거대 AI 모델은 초거대 자본, 초거대 데이터센터, 초거대 전력망이 결합되어야만 만들어집니다. 작은 규모로는 불가능합니다. 중국과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면 이 길밖에 없습니다.


아시아의 AI 수도란?


"아시아태평양 AI 수도"라는 표현이 처음엔 추상적으로 들렸습니다. 하지만 차 의원의 설명을 듣고 나니 명확해졌습니다.


국내 시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AI 생태계가 형성되려면 시장이 있어야 투자가 이루어지고, 투자가 있어야 시장이 형성되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 딜레마를 깨는 방법은 시장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한국을 중심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의 수요를 커버하는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면 블랙록이 가진 전 세계 AI 인프라 로드맵에서 한국이 전략적 파트너가 됩니다. 단순히 한국만을 위한 인프라가 아니라,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AI 전환을 리드하는 허브가 되는 것이죠.


차 의원은 이 시장의 규모를 "경단위"라고 표현했습니다. 경은 조의 만 배입니다. 상상이 가지 않는 규모지만, 아시아태평양 전체가 디지털로 전환될 때 만들어질 신산업의 크기가 그렇다는 겁니다.


같은 배를 탄 사람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합니다. 외국 기업이 들어오면 우리 기업과 충돌하지 않을까요? 블랙록이 자기 이익만 챙기지 않을까요?


차 의원은 이 부분을 명확히 구분했습니다. 투자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합니다.


전략적 투자는 외국 기업이 자신의 지부를 만들어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투자 기업과 한국 기업이 경쟁 관계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블랙록의 방식은 재무적 투자입니다. 함께 자본을 투입하고, 함께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수익을 공동으로 나눕니다.


"같은 배를 탄 겁니다. 이 사업이 잘 되어야 블랙록도, 한국도 이익을 봅니다."


래리 핑크 블랙록 회장이 "한국인의 전략과 사고에 맞춘 투자를 하겠다"고 약속한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블랙록의 투자가 성공하려면 한국의 맥락에서 한국의 전략과 조율해야 하니까요.


협상 과정도 단계적으로 설계되어 있습니다. 한 단계가 끝나고 양쪽의 이해가 최대화되었을 때만 다음 단계로 넘어갑니다. 안전장치가 촘촘하게 마련되어 있는 것이죠.


한국이 가진 강점


그렇다면 블랙록은 왜 한국을 선택했을까요?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가 투자처를 고를 때 본 한국만의 강점은 무엇이었을까요?


차 의원은 세 가지를 꼽았습니다. 한국이 가진 기술 인프라와 인력,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의 의지. AI 고속도로와 에너지 고속도로에 대한 명확한 의지가 블랙록의 전략과 맞아떨어졌다는 겁니다.


"한국이 가진 강점과 블랙록이 가진 글로벌 로드맵을 일치시키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블랙록 입장에서도 한국이 주요한 투자처가 된 이유입니다."


경제적 파급효과


직접적인 효과는 명확합니다. 수십조원 규모의 투자금이 들어오고, 건설 과정에서 국내 업체가 60~70% 참여합니다. 재생에너지 인프라와 데이터센터 건설에서 엄청난 경제적 리턴이 발생할 겁니다.


하지만 차 의원이 더 기대하는 건 간접 효과입니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AI 전환 과정에서 만들어질 신산업의 규모가 경단위입니다. 우리가 그 출입구를 찾고, 글로벌 플레이어와 협력해서 그 생태계의 일부를 차지하는 것. 이게 한국이 2030년대, 2040년대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일 뿐 아니라 선도국가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략입니다."


인프라를 잡아내고, 그 인프라에 연결된 생태계를 잡아내고, 거기서 발생하는 신산업의 접촉점을 만드는 것. 이것이 진짜 목표입니다.


현실적인 우려들


물론 우려도 있습니다. 재생에너지는 불안정하지 않나요? 한국은 땅값도 비싸고 전기료도 비싼데 경쟁력이 있을까요?


차 의원의 답변은 차분했습니다.


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은 기존 원전과의 믹스 에너지 전략으로 보완합니다. 그리고 재생에너지 투자가 어느 정도 규모 이상을 넘어가면 오히려 안정성과 가격 경쟁력이 확보됩니다. 글로벌 전문가들과 협력해서 탄탄한 로드맵을 만드는 것이 이번 협력의 핵심입니다.


땅값과 전기료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에서 중요한 건 물리적 크기가 아니라 전력망과 자본입니다. 수십조원 투자 규모에서 부지 비용은 상대적으로 작습니다. 더 중요한 건 클린 에너지 기반의 안정적인 전력망을 구축하는 것이죠.


대전 화재가 남긴 교훈


인터뷰 말미에 차 의원은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를 언급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한국의 디지털 전환이 다른 나라보다 빨랐습니다. 그게 우리의 성장 동력이었죠. 하지만 빠른 만큼 오래된 부분도 있습니다. 지금은 차세대 디지털 인프라에 과감한 투자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공공과 민간 영역 전체의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인프라를 정교하게 재설계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구축과 함께 한국의 디지털 인프라 전체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이런 재난적 상황의 리스크도 현저히 줄어들 거라고 그는 믿었습니다.


숨은 주역의 철학


인터뷰를 보면서 한 가지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국경없는의사회에서 활동하던 의사가 어떻게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이끌게 되었을까요?


그의 철학은 일관적이었습니다. 개인의 질병을 치료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회 시스템과 인프라가 더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줍니다. AI는 앞으로 사람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여기에 집중했습니다.


"직업은 많이 변했지만, 결국 하고자 하는 건 사회적 고통을 줄이는 문제입니다. 의사의 역할을 다른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것뿐이죠."


숨은 주역. 정청래 의원이 그를 그렇게 부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화려한 무대 뒤에서, 한국의 미래를 설계하는 사람. 의사의 마음으로 사회를 치유하려는 사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


이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몇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째, 전략은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AI 강국"이라는 구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 재생에너지 인프라, 글로벌 파트너십처럼 구체적인 로드맵이 필요합니다.


둘째, 규모를 키워야 합니다. 국내 시장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시아태평양 전체를 바라보는 시야가 필요합니다.


셋째, 협력이 핵심입니다. 우리끼리만으로는 안 됩니다. 글로벌 플레이어의 강점과 우리의 강점을 결합해야 합니다.


넷째, 시간이 없습니다. 중국과 미국의 초격차는 이미 수십 배입니다.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2030년의 한국


차지호 의원이 그리는 미래가 궁금해졌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2030년의 한국은 어떤 모습일까요?


아마도 서울 어딘가에, 혹은 부산이나 광주 어딘가에, 축구장 수백 개 크기의 하이퍼스케일 데이터센터가 서 있을 겁니다. 그 옆에는 거대한 풍력 발전 단지나 태양광 단지가 함께 있겠죠. 깨끗한 에너지로 돌아가는 AI의 두뇌.


그곳에서 만들어진 AI 서비스가 한국을 넘어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로 퍼져나갈 겁니다. 한국 기업들이 아시아태평양 시장에서 활약하고, 새로운 산업이 계속 태어날 겁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시작점에, 국경없는의사회에서 일하던 한 의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게 될 겁니다.


"사회적 고통을 줄이는 것이 제 목표였습니다."


차지호 의원의 이 한마디가 오래 남습니다. AI도, 투자도, 인프라도 결국 사람을 위한 것이니까요. 기술은 수단이고, 목적은 언제나 사람입니다.


블랙록이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저는 이런 철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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