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선택
작년 가을, 국가R&D 평가위원회 회의실에서였습니다. 오전 첫 발표 팀은 화려했습니다. 세련된 슬라이드가 넘어갈 때마다 "세계 최초", "혁신적 접근", "패러다임 전환"이라는 단어들이 쏟아졌습니다. 연구책임자의 목소리에는 열정이 넘쳤고, 팀원들의 눈빛은 자신감으로 빛났습니다.
오후 마지막 발표 팀은 대조적이었습니다. 슬라이드는 담백했고, 수사는 절제되어 있었습니다. 그저 "이만큼 했습니다"라는 데이터와 몇 장의 실험 사진뿐이었습니다. 연구책임자는 말수가 적었습니다. 대신 노트북을 열어 실제로 작동하는 프로토타입을 보여주었습니다.
6개월 후, 최종평가에서 두 팀의 운명은 엇갈렸습니다. 화려했던 첫 번째 팀의 성과지표 달성률은 60%였습니다. 조용했던 두 번째 팀은 125%를 기록했습니다.
평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가 20년 가까이 R&D 현장에서 목격한 진짜 고수들은 모두 말이 적었다는 것. 그들은 자신의 계획을 떠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조용히 실험실에서 시간을 보냈고, 어느 날 갑자기 놀라운 결과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왜 그들은 말하지 않았을까요?
대학원 시절, 지도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계획을 말하는 순간, 그 계획의 절반은 이미 죽는다."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연구 현장에서 수많은 프로젝트를 보면서, 그 말의 무게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연구팀의 이야기입니다. 젊고 열정적인 팀장은 월례회의 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쏟아냈습니다. "이번 달에는 이런 접근법을 시도해볼 겁니다." "다음 분기에는 저런 실험 디자인으로 가겠습니다." 동료들은 박수를 쳤고, 상급자들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열정적인 발표와 달리, 실제 성과는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회의실에서는 빛났지만, 실험실에서는 빛을 잃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 팀장은 발표 준비에 일주일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월례회의 자료를 만들고, 상급자의 질문을 예상하고, 동료들의 반응을 신경 쓰느라 정작 연구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19세기 철학자 니체는 이미 이것을 간파했습니다. 그는 "말하는 순간 우리의 내적 에너지가 분산된다"고 했습니다. 현대 신경과학도 그의 말을 뒷받침합니다. 계획을 말할 때 뇌에서는 실제로 그 일을 해냈을 때와 비슷한 도파민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말하는 것만으로 일종의 성취감을 느껴버리는 거죠. 그러면 실제로 행동할 동기는 약해집니다.
연구자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 귀중한 에너지를 어디에 쓸 것인가. 발표 자료를 다듬는 데 쓸 것인가, 아니면 실험 데이터를 모으는 데 쓸 것인가. 말하는 데 쓸 것인가, 아니면 만드는 데 쓸 것인가.
또 다른 팀의 이야기입니다. 이 팀은 중간평가에서 야심찬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내년까지 임상 1상에 진입하겠습니다." 평가위원들의 기대는 높아졌고, 언론도 주목했습니다.
하지만 연구는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나타났고, 초기 가설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연구자라면 당연히 겪는 일입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었습니다.
팀은 방향을 전환해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약속을 했기 때문입니다. 평가위원들은 "그때 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잖아요"라는 눈빛을 보냈습니다. 연구책임자는 밤잠을 설쳤습니다. "실패했다고 생각하겠지." "능력이 없다고 판단하겠지."
결국 그 팀은 잘못된 방향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습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것을 "노예 도덕"이라고 불렀습니다. 타인의 승인을 구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를 잃습니다.
반면에, 계획을 공개하지 않은 연구자는 자유롭습니다.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즉시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 체면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타인의 기대라는 무게를 지지 않아도 됩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진짜 혁신은 이런 자유 속에서 탄생합니다.
제 동료 중에 박 박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말이 정말 적습니다. 커피 타임에 다른 연구자들이 자신의 연구 진척을 이야기할 때, 그는 그저 웃으며 듣기만 합니다. "요즘 뭐 하세요?"라고 물으면 "그냥 이것저것요"라고만 답합니다.
처음에는 무뚝뚝하거나 비협조적인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3년을 함께 일하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는 말을 아끼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를 아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국제 학술지에 논문을 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도 해당 분야 최상위 저널이었습니다. 다들 놀랐습니다. "언제 그런 연구를 했어요?" 그는 담담히 답했습니다. "2년 정도 됐죠."
2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그 연구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커피 타임의 잡담에도, 월례회의의 연구 근황 공유에도, 그 이야기는 없었습니다. 그는 그저 매일 출근해서 조용히 실험했고, 데이터를 모았고, 분석했고, 논문을 썼습니다.
그의 방식이 특별해 보였지만, 사실 역사 속 위대한 연구자들은 대부분 이랬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7년 동안 혼자 연구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특허청 직원으로 일하면서, 퇴근 후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계산했습니다. 마리 퀴리는 피에르 퀴리와 함께 낡은 창고에서 라듐을 추출하면서도, 완전히 확신하기 전까지는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말보다는 손을 움직였다는 것. 선언보다는 결과로 증명했다는 것. 과정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보다는, 완성된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았다는 것.
국가R&D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실패는 필연입니다. 연구개발이란 불확실성과의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실패를 어떻게 다루느냐입니다.
계획을 공개한 연구자는 실패했을 때 곤란해집니다. "저번에 자신 있게 말했는데..."라는 시선을 견뎌야 합니다. 그래서 실패를 숨기려 하거나, 아니면 장황한 변명을 늘어놓게 됩니다. "예산이 부족해서", "협력기관이 비협조적이어서", "코로나 때문에"...
하지만 조용히 일하는 연구자는 다릅니다. 실패해도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서 실패를 창피함이 아니라 학습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이 안 되면 저 방법을 시도하고, 저것도 안 되면 또 다른 접근을 시도합니다. 시행착오의 횟수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실리콘밸리에 "Fail fast, learn faster"라는 말이 있습니다. 빨리 실패하고, 더 빨리 배우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한국의 R&D 환경에서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실패에 대한 관용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더욱, 조용히 일하는 것이 전략적입니다. 타인의 시선 없이 충분히 실험하고, 충분히 실패하고, 충분히 배운 다음, 최적의 방법을 찾아냈을 때 그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최근에 자문했던 한 바이오 스타트업의 사례입니다. 그들은 신약 후보 물질 개발에 3년을 쓰면서, 투자자들에게 분기마다 간단한 보고만 했습니다. "진행 중입니다." "일부 조정이 있었습니다." 구체적인 중간 과정은 공유하지 않았습니다.
투자자들은 불안했을 겁니다. 하지만 3년 후, 그 팀은 동물실험에서 획기적인 효능을 입증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상세한 데이터를 공개했습니다. 그 결과, 후속 투자 유치에 성공했고, 현재는 임상 시험을 준비 중입니다.
만약 그들이 매 분기마다 세세한 진행 상황을 공유했다면 어땠을까요? 실패한 후보 물질마다 설명을 요구받았을 겁니다. 방향 전환마다 투자자를 설득해야 했을 겁니다. 그 에너지를 실제 연구에 쏟을 수 있었기에, 더 빠르게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조용히 일한다는 것이 소통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R&D는 협업이 필수이고, 특히 국가R&D는 투명성이 법으로 요구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말하지 않을 것인가"를 전략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말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법적으로 요구되는 보고, 안전과 관련된 정보, 협력기관과의 필수 기술 공유. 이런 것들은 당연히 투명하게 소통해야 합니다.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아직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 중간 과정의 시행착오, 과도한 포부나 자신감. 이런 것들은 굳이 공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중간평가 보고서를 작성할 때를 생각해봅시다. 두 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 번째 방식은 과정 중심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팀원들의 헌신으로...", "예산 부족에도 불구하고...", "협력기관과의 조율이 쉽지 않았으나..." 이런 식입니다. 읽는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알게 되지만, "얼마나 이루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방식은 결과 중심입니다. "목표 대비 현재 달성률 73%", "3건의 논문 게재", "2건의 특허 출원", "프로토타입 1차 완성".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과정의 드라마는 없지만, 성과는 분명합니다.
어느 쪽이 더 강력할까요? 평가위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답은 명확합니다.
조용히 일한다는 것은 때로 외로운 일입니다. 동료들이 점심시간에 자신의 연구 이야기로 꽃을 피울 때, 당신은 그저 듣기만 해야 합니다. 학회에서 다른 연구자들이 "진행 중인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소개할 때, 당신은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본능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이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독을 견딜 수 없는 자는 군중 속에서도 외롭다"고 말했습니다.
진짜 고독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타인의 승인 없이도 자신의 가치를 믿는 것입니다. 외부의 격려가 없어도 스스로를 동기부여하는 것입니다. 칭찬받지 못해도 오늘 한 실험이 의미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몇 년 전, 한 젊은 연구자와 커피를 마신 적이 있습니다. 그는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주변 동료들은 학회 때마다 발표하고, SNS에 연구 근황을 올리는데, 저는 그럴 게 없어서 초라합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난 6개월 동안 무엇을 했나요?" 그는 답했습니다. "논문 한 편을 쓰고, 실험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그거면 충분하지 않나요? 발표를 10번 한 것과 논문 1편을 완성한 것 중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요?"
그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조용히 웃었습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가시적인 것에 현혹됩니다. 화려한 발표, 많은 '좋아요', 사람들의 박수. 하지만 진짜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집니다. 고독한 실험실에서, 깊은 밤 컴퓨터 앞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의 성실함에서.
몇 년 전, 한 국책연구원의 최종평가에 참석했습니다. 마지막 발표 팀의 연구책임자는 나이 지긋한 교수님이었습니다. 그는 발표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말을 잘 못합니다. 대신 만든 것을 보여드리겠습니다."
발표 슬라이드는 10장이 채 안 되었습니다. 연구 배경, 목표, 그리고 결과. 그게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다음이 압권이었습니다. 그는 노트북을 열어 실제 시스템을 시연했습니다. 20분 동안, 평가위원들은 그저 화면을 바라보며 탄성을 질렀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한 평가위원이 물었습니다. "이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3년 6개월입니다."
"중간에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교수님은 잠시 미소 짓고는 답했습니다. "어려움이 없는 연구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보다는, 결국 이것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팀의 평가 점수는 최상위였고, 후속 과제도 선정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성공하게 만들었을까요? 화려한 발표 기술도, 정치적 네트워킹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묵묵히 만들어낸 결과물이었습니다.
니체는 "침묵하는 자의 행동이 첫 마디 말보다 강하다"고 했습니다. R&D의 세계에서 이것은 더욱 진실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기획서도, 실제 작동하는 프로토타입 하나를 이기지 못합니다. 아무리 열정적인 중간보고도, 한 편의 논문만 못합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에 에너지를 쓰고 있나요? 말하는 것에, 아니면 만드는 것에?
물론 둘 다 필요합니다. 하지만 균형이 중요합니다. 만약 당신이 발표 준비에 실험 시간만큼의 시간을 쓰고 있다면,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만약 당신의 계획을 듣는 사람은 많은데 당신의 결과를 보는 사람은 적다면, 방향을 재고해야 합니다.
조용히 일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오늘날처럼 모든 것을 공유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SNS에는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자랑하는 게시물이 넘쳐나고, 학회에서는 "곧 발표할 연구"를 소개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10년 후, 사람들은 당신의 무엇을 기억할까요? 당신이 얼마나 많이 말했는지, 아니면 당신이 무엇을 만들어냈는지?
다음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한 번 시도해보면 어떨까요. 동료들에게 거창한 포부를 발표하는 대신, 조용히 책상에 앉아 첫 번째 실험을 설계하는 것. 학회에서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소개하는 대신, 그 아이디어를 검증할 예비 데이터를 모으는 것.
6개월 후, 1년 후, 당신은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을 줄인 만큼 손이 더 많이 움직였다는 것을. 선언을 자제한 만큼 결과가 더 단단해졌다는 것을.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이 조용히 만들어낸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을 때, 사람들은 놀랄 것입니다. "언제 이런 걸 했어요?"
그때 당신은 담담히 답하면 됩니다. "그냥, 묵묵히 했습니다."
그것이 진짜 연구자의 말입니다.
어느 가을 오후, KRISS 연구실 창가에서 김현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