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혁신의 역설
최근 '지성과 고독'에 관한 흥미로운 글을 읽었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니체, 쇼펜하우어까지 인용하며, 똑똑한 사람일수록 혼자 있는 시간을 선호하고 소수의 깊이 있는 관계만을 유지한다는 내용이었다. 2016년 영국 심리학 연구까지 곁들여진, 설득력 있는 논지였다.
그런데 국가연구개발사업을 기획하고 평가하는 내 입장에서는, 이 '고독한 천재' 패러다임이 낯설게 느껴진다.
뉴턴은 페스트로 고향에 틀어박혀 만유인력을 발견했고, 아인슈타인은 홀로 산책하며 상대성 이론을 구상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활동하던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현대 R&D의 풍경을 보자. 노벨상 수상자들의 공동 연구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CRISPR 유전자 가위는 생화학자, 미생물학자, 구조생물학자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ChatGPT는 수백 명의 엔지니어, 연구자, 윤리학자가 함께 만든 결과물이다.
최근 내가 검토한 국가 R&D 과제 공고문들을 펼쳐놓으면 한 가지 패턴이 보인다.
융합연구 가점 부여
산학연 협력 필수
리빙랩 및 사용자 참여형 연구 우대
오픈 이노베이션 플랫폼 활용 권장
정책 입안자들은 이미 알고 있다. 21세기 혁신은 고독한 천재의 머릿속이 아니라, 다양한 전문가들이 모여 부딪히는 경계면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PMP와 Agile 방법론을 R&D에 접목하면서 더욱 확신하게 됐다. 혁신은 본질적으로 대화의 산물이라는 것을.
애자일의 핵심 가치를 보자.
프로세스보다 개인과의 상호작용
문서보다 작동하는 소프트웨어와 실험
계약보다 고객과의 협력
계획보다 변화에 대한 대응
매일 15분씩 진행하는 스탠드업 미팅, 2주마다 이해관계자와 나누는 스프린트 리뷰, 실패를 공유하는 회고 세션. 애자일은 끊임없는 소통을 통해 불확실성 속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방법론이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완벽한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작은 실험을 반복하며 배워가는 것. 이것이 현대 R&D의 본질이다.
요즘 나는 생성형 AI를 R&D 기획에 접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ChatGPT, Claude 같은 도구들이 기획자의 업무를 어떻게 혁신할 수 있을지 실험 중이다.
흥미로운 점은, AI가 나를 더 고독하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AI와의 대화를 통해 아이디어를 빠르게 구체화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검토하고, 여러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한다. 그리고 그렇게 정제된 생각을 동료들, 연구자들, 평가위원들과 나눈다. AI는 나의 사고를 증폭시키지만, 최종 의사결정은 여전히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이루어진다.
생성형 AI 시대의 R&D 전략가는 '고독한 현자'가 아니라 '증강된 협력자'다.
그렇다면 고독은 무의미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여전히 새벽 시간을 사랑한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그 시간에, 복잡한 정책 문서를 읽고, 전략의 큰 그림을 그리고, 본질적인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이 연구가 정말 사회에 기여할 것인가?" "우리가 놓치고 있는 관점은 무엇인가?" "10년 후 이 기술은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이런 질문들은 회의실에서 나오지 않는다. 혼자 깊이 사색할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하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나는 그 고독 속에서 얻은 통찰을 혼자 간직하지 않는다. 다음 날 동료들과 만나 그것을 시험대에 올린다. 비판받고, 보완하고, 때로는 완전히 뒤집힌다. 그 과정에서 진짜 가치가 탄생한다.
결국 21세기가 요구하는 지성은 이것이 아닐까.
깊이 사유할 수 있는 고독의 능력과 다양한 사람들과 협업할 수 있는 개방의 자세를 동시에 갖추는 것.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되, 필요할 때는 과감히 가까이 다가가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것.
니체가 말한 '고독 속의 창조'를 실천하되, 그 창조물을 세상과 나누며 집단지성으로 진화시키는 것.
R&D 혁신의 현장에서 내가 보는 가장 뛰어난 연구자들은 이런 사람들이다. 연구실에서는 누구보다 집중력 있게 몰입하지만, 세미나장에서는 가장 적극적으로 질문하고 토론하는 사람들. 자기 분야에서는 최고 전문가이지만, 타 분야 전문가의 이야기를 겸손하게 경청할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은 고독한 천재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고독을 활용하는 협업자들이다.
나는 브런치에 이 글을 쓰며, 나만의 균형점을 찾아간다.
새벽 시간은 나를 위해 남겨둔다. 커피 한 잔과 함께 앉아,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때로는 AI와 대화하며 아이디어를 벼린다.
하지만 해가 뜨면 사람들 속으로 들어간다. 연구자들을 만나고, 평가위원들과 논의하고, 정책 입안자들과 전략을 고민한다.
고독은 연료이고, 협업은 엔진이다. 둘 다 있어야 혁신이라는 자동차는 앞으로 나아간다.
당신은 어떤 균형을 찾아가고 있는가?
김현철 | AI R&D 전략플래너
기계공학 박사 | PMP & Agile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