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명이 만든 텔레그램

그리고 우리 R&D의 미래

어제 송길영 작가의 신간을 읽다가 손이 멈췄다.

"텔레그램은 구성원이 30명입니다."

세계 5억 명이 쓰는 메신저가 고작 30명으로 운영된다고? 미드저니는 40명, 그리고 베이스44라는 회사는... 단 1명. 매출은 300만 달러, 회사 가치는 1억 달러.

나는 15년째 국가연구개발사업을 기획하고 평가하는 일을 해왔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아직도 참여기관 10개, 연구인력 100명짜리 대형 과제를 '좋은 과제'라고 부르고 있는 건 아닐까?"


규모가 곧 경쟁력이던 시대는 끝났다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박사를 받았을 때만 해도, 큰 연구실이 곧 좋은 연구실이었다. 연구원이 많고, 장비가 많고, 예산이 클수록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믿었다.

송길영 작가는 이를 "대마불사(大馬不死)"라고 표현한다. 크면 클수록 안전하다는 믿음. 그런데 지금은?

"대마필사(大馬必死)의 시대"라고 선언한다.

왜일까.

시장은 더 이상 커지지 않는다. 중국이 10조를 투자하면 우리가 20조를 투자해야 했던 그 게임은 이제 끝이다. 한 번 실패하면 산업 전체가 흔들린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AI가 작은 조직의 큰 성과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사라지는 중간 단계들

Agile 방법론을 R&D 현장에 적용하면서 늘 답답했던 게 있다.

왜 이렇게 보고가 많을까. 월간보고, 중간점검, 단계평가... 연구자들은 실험보다 보고서 쓰는 시간이 더 많다고 푸념한다.

송길영 작가는 200년 전 이야기를 꺼낸다. 아담 스미스의 분업, 그리고 분업된 일을 관리하는 관료제. 이 둘은 한 쌍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생산 단위가 기계로 대체되면 관리 대상이 사라져요."

맞다. AI가 데이터를 모으고, 정리하고, 심지어 분석까지 한다. 그럼 그걸 취합하고 보고하던 사람들은?

작가는 명확하게 말한다.

"관리직이란 직업 자체가 예전같이 구조화돼서 남아있을 것 같지 않아요."


학력이 아니라 서사를 보라

가장 충격적이었던 대목은 이 질문과 답변이었다.

"이력서엔 뭐가 어필돼야 하나요?"
"나의 서사요."

서사.

얼마나 오래, 얼마나 깊이 그 문제를 고민해왔는가. 실패를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왜 그 일을 하려고 하는가.

ChatGPT가 완벽한 자기소개서를 써주는 시대다. 박사학위, SCI 논문, 특허 등록... 이런 스펙은 이제 의미가 없을까? 아니,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요즘 이메일이 영어로 오는데 너무 잘 쓴 이메일이 와요. 근데 막상 만나보면..."

그래서 면접이 다시 중요해진다고 한다. 텍스트는 믿을 수 없으니까.

우리 R&D 평가도 마찬가지 아닐까. 제안서는 AI가 써줄 수 있다. 하지만 그 연구자가 10년간 어떤 질문과 씨름해왔는지, 그 진정성은 면접에서만 확인할 수 있다.


엄두도 못 냈던 것에 도전할 때

작가는 데미스 허사비스의 노벨 화학상 이야기를 꺼낸다.

AlphaFold. 단백질 3차원 구조 예측. 인간이 50년간 2%밖에 못 풀었던 문제를 AI가 98% 풀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엄두를 못 냈던 큰 일, 이쪽에서 큰 기회가 나올 겁니다."

나는 R&D 기획자로서 늘 안전한 과제만 선정해왔다. 3년 안에 논문 3편, 특허 2건. 실패하면 예산 책임 문제가 생기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AI는 계산 시간을 수백 배 단축시킨다. 불가능해 보였던 시뮬레이션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제는 담대할 때다.

기후변화의 정밀 예측, 노화의 완전한 해독, 핵융합 에너지...

10년 전이었다면 "너무 크고, 불확실하고, 오래 걸린다"며 포기했을 과제들. 이제는 도전할 수 있다.


선택이 아닌 필수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송길영 작가는 단호하게 말한다.

"이거 안 하면 안 돼요. 직업을 가지시면 다 하셔야 돼요. 이건 선택할 수 없어요."

경쟁국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우리가 "아직은..."이라고 망설이는 동안, 30명짜리 스타트업이 우리 100명짜리 컨소시엄을 추월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건 기회이기도 하다.

우리는 빠르게 배우는 민족이다. IT 인프라가 탄탄하고, 우수한 인재가 많다. 경량화, 플랫폼화, AI 협업...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경기장일지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국제전화 국가번호가 +82 이지 않은가 ㅎㅎ)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

사무실로 돌아와 노트를 펼쳤다.

올해 안에 해볼 것:

담당 과제 5개, 월간보고 폐지하고 실시간 대시보드로 전환

소규모 고효율 트랙 신설 제안 (10명 이하, AI 활용 필수)

평가위원회에 "서사 평가" 가이드라인 제안

내년부터 해볼 것:

심층 면접 비중 50%로 확대

연구데이터 실시간 공유 플랫폼 구축

"담대한 과제" 파일럿 3개 선정

송길영 작가의 말처럼, 지금까지 우리는 중첩된 문명을 쌓아왔다.

이제는 날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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