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독일의 ‘하일리겐슈타트’ 숲에 감사해야 한다.
주변의 수많은 숲이 있는데, 굳이 독일의 숲에 감사해야 하나며 반문할 수도 있다. 그래도 해야 한다. 적어도 베토벤의 음악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은 그래야 한다.
잘나가던 음악가 베토벤은 30대에 청력을 완전히 잃었다. 음악가로서는 치명적이다. 난청을 앓고부터 심각한 우울증에도 빠지게 된다. 동생에게 유서(편지 형식의 이 유서는 동생에게 보내지 않았고, 그의 사후 유품에서 발견됐다)를 쓸 정도로 심각했다. 베토벤의 우울증은 청력 상실이 큰 원인이지만, 그의 성장 환경도 한몫했다.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폭력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가난한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 음악가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내 세워 아들에게 지독하게 폭력을 휘둘렀다. 청력을 잃었고, 우울증에 고통받은 베토벤이 인류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명곡을 남길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하일리겐슈타트 숲이다.
율리우스 슈미트의 그림 ’산책하는 베토벤‘에서 볼 수 있듯이 베토벤은 우울증을 자연과 대화를 통해 극복했다. 오후 2시만 되면 하일리겐슈타트 숲을 걷는 게 그의 중요한 하루 일과였다. 베토벤은 심지어 ’사람은 속일 때 있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고 할 정도로 숲속에 푹 빠진 삶을 살았다. 하일리겐슈타트 숲에서 자신과 고독한 대화를 나눴을 거다. 자기와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에게 씌워진 운명의 굴레를 알았을 거고, 거기서 빠져나오는 방법도 찾았을 거다. 이때 작곡한 전원교향곡은 청각장애를 앓는 게 맞을까는 의문이 들 정도다. 4악장 모두 새소리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 운명, 합창 등 그의 대표적인 교향곡은 이때 만들어졌다. 베토벤이 걸었던 하일리겐슈타트 숲에는 ’베토벤의 산책길‘이 현재 조성돼 있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직전이다. 필자가 매일 새벽 다니는 앞산 고산골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 젊은 여성이 다리 난간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두고서 사라진 거다. 다리가 높지는 않지만, 신발을 벗어둔다는 의미를 알기에 고산골 사람들은 술렁였다. 다행히 여성은 맨발로 숲을 걷기 위한 해프닝이었던 것으로 드러나 모두가 안도했다.
필자는 이 소동이 있은 지 며칠 뒤 새벽 등산을 하고 내려오다가 그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인사하는 필자에게 “매일 숲속을 걸으면 우울증이 나을까요?”라고 질문했다. “당연하죠. 매일 숲의 푸르름을 만나면 우울증 정도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는 대답을 한 것 같다. 그녀는 며칠 후부터 고산골에서 완전히 보이질 않았다. 필자의 대답이 그녀가 나아갈 나침반이 되지 못한 거다.
산림치유를 공부하면서, 그 여성과 나눈 대화가 자주 떠 오른다. 그때 ’베토벤과 하일리겐슈타트 숲‘ 얘기를 해 줬다면 그 여성은 계속 숲속을 걸었을까는 질문을 스스로 하게 된다. 물론 자신의 아픔을 스스로 드러내고서 나아갈 길을 물었던 젊은 여성이 고산골에 오지 않았다고 해서 부정적 결론을 내렸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틀림없이 자신을 아픔에서 벗어나 건강한 삶을 누리고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산림치유를 공부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날 현장은 너무 아쉽다. 하일리겐슈타트 숲에서 베토벤의 치유 스토리를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그 멋진 산림 치유 인자를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한 거다.
새벽 숲과 인연을 맺은 첫날을 잊을 수 없다. 11월 첫날 어둠을 뚫고서 오른 산 정상은 남다른 세계였다. 별천지였다. 자연경치가 좋아서 별천지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아침을 맞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어두움 속에서도 파랗게 빛날 정도였다. 그날 이후로 17~8년을 특별한 일이 없으면 새벽 숲에서 하루를 열었다. 숲의 치유능력을 수없이 경험했고, 인생 후반전은 결국 숲과 함께하기로 했다.
하일리겐슈타트 숲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던 베토벤에게 치유의 선물을 주었다. 필자도 누군가에게 하일리겐슈타트 숲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