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우리에게 한때 너무나 익숙했던 산아제한 캠페인 문구다. 우리의 전통 남아선호 사상을 한방에 무너뜨린 잘 만든 슬로건 가운데 하나다. 정부의 공공 슬로건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이 슬로건을 모방한 패러디도 무척 많았다. ‘잘 키운 슬로건 하나 열 홍보 안 부럽다·잘 키운 K팝 스타 열 아이돌 안 부럽다.’ 등 다양한 패러디가 지금도 줄을 잇고 있다. 그러나 이 표어는 결과론적으로 절반만 성공한 셈이다. 우리의 출산을 줄이는 데는 혁혁한 성과를 냈지만, 그 성과가 지금의 전 세계 최저 출산율로 이어져 인구 절벽시대를 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의 인구 정책을 둘러싼 국가 정책의 실패가 가장 큰 원인이지만, 여하튼 이 슬로건도 한몫한 건 부인하기 힘들다.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의 걸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다시 읽고 있다. 이 책은 사랑과 역사, 이데올로기 속에서 끝없이 반목, 갈등하고 방황하는 주인공을 통해서 ‘인간이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존재’라는 걸 인식시킨 소설이다. 물론 작가는 인간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반드시 가져야 할 하나의 가치 척도로는 보지는 않는다. 때로는 가벼움이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그 가벼움이 때로는 무거움으로 순식간에 바뀌는 게 인간이라고 얘기한다. 여하튼 미국 시사저널 타임지에 의해 ‘1980년대 최고의 소설 10’에 선정될 정도로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밀란 쿤데라가 오늘 인간의 존재에 관한 소설을 다시 쓴다면, 작가는 무엇을 쓸까 하고 필자 나름대로 상상한 적이 있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참을 수 없는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쏟는 인간의 문제를 꿰뚫어 보았을 것 같다. 아마도 제목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지루함’으로.
인간은 지루한 걸 참지 못한다. 현대인들은 더하다. 특히 초고령화 사회, 백세시대는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의 키워드가 더 커지고 있다. ‘백수 과로사 한다’는 말 역시 ‘참을 수 없는 지루함’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은퇴 후 지루한 일상을 참지 못하고 이 친구, 저 친구와 어울리고 이곳저곳을 기웃하느라 현역에 있을 때보다 더 바쁜 모습 보이는 걸 상징하는 관용구인 셈이다.
노인복지관 관장으로 있는 후배와 최근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필자의 은퇴 생활이 궁금하다며 뭘 하고 지내느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단순한 대답을 줄 수밖에 없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숲에서 서너 시간 걷고, 오후에는 도서관에 가서 이런저런 책을 읽거나 가볍게 글을 쓴다고 했다. 퇴직 후 2달 동안 거의 되풀이되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루틴이 있어야 하네요. 나만의 확실한 루틴 하나만 있어도 삶이 그리 지루하지 않고, 나름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며 복지관 회원들을 위해 자신의 루틴을 만드는 방법을 찾아보아야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나름의 확고한 루틴을 가진 필자는 후배 관장의 말에 너무나 공감이 됐다.
순간 ‘잘 키운 루틴(routine) 하나 열 친구 안 부럽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의 수많은 패러디 가운데 하나겠지만, 백세시대 필요한 화두가 아닐까.
무언가를 몰입할 수 있는 루틴을 가졌다는 건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박완서 작가의 수필집 <세상에 예쁜 것>에 나오는 한 토막이다. 동창 가운데 현실과 삶의 여유 등 모든 게 완벽한 친구가 있다. 그래서 친구들은 그녀를 ‘얄미운 할망구’라고 모두 부른다. 완벽한 그녀에게 분노할 일이 생겼다. 후덕한 전문직 며느리가 회사 포상으로 싱가포르 여행을 가게 됐는데, 친정엄마와 동행한다고 자신에게는 애들을 좀 봐달라고 했다고 한다. 완벽한 친구는 흥분해 작가에게 전화를 해, 섭섭한 감정을 터트렸다. 박완서 작가는 여행을 가기 전 감정을 얘기해 ‘좋은 사돈·고부 관계’를 흔들지 말고 갔다 오면 얘기하라고 조언했다. ‘얄미운 할망구’는 작가의 조언에 따라 당시 인기 있던 영문판 해리포터 1권을 구입, 모르는 단어를 사전에서 일일이 찾아서 읽었다고 한다. 영문 해리포터 읽기에 몰입하는 바람에 며느리에 대한 감정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어졌다고 한다. 며느리가 귀국해서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며 작가에게 웃으며 전화했다는 거다.
매일 새벽 숲속을 걸을 때 많은 이들을 만난다. 우선 이들 대부분은 겉모습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는 데 놀라고, 그다음은 대부분 오랜 시간을 숲속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다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따뜻하고 긍정적이며 결코 ‘타인 의존적’이지 않는 삶의 자세를 지키고 있다. 대부분 나름 자기만의 루틴이 확고한 분들이다.
산성산 전망대에서 거의 매일 만나는 방앗간 사장님은 일흔아홉의 나이지만, 생각이 무척이나 젊고 긍정적이다. 자신의 방앗간을 임대하면 운영 수익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거다. “돈 문제보다 방앗간을 통해 이런저런 소일을 즐기며 하루 일상을 보낼 수 있는 게 훨씬 좋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역시 산성산 전망대에서 필자와 매일 마주치는 두 여성이 있다. 이 여성들은 필자가 숲으로 들어가면은 항상 내려온다. 도대체 언제 등산을 하는지 궁금해 물어보면, 언제나 같은 대답이다. “몇 시에 집을 나서는지요?”라고 하면, “어제 여기서 잤다”며 웃는다. 50대 후반,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여성의 나이는 일흔을 넘었다고 방앗간 사장님은 말한다.
매일 숲길 15키로 정도를 걷는 전직 법무사 K도 마찬가지다. 그는 일흔하나의 적지 않는 나이지만, 매년 백두대간을 도전하고 있다. 젊은이들도 힘들어하는 백두대간을 그는 지금까지 6번 완주했다. 백두대간을 4번 더 완주해 열 번을 채울 계획이라고 매일 새벽 앞산 일대를 걷고 또 걷고 있다.
백세시대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리고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루틴 하나씩 만들자.
적어도 서너 시간을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고, 홀로 즐길 수 있는 루틴이면 더 좋다. 스스로 고독력을 키울 수 있는 루틴은 언제나 자신을 독립적으로 만든다. 이왕이면 숲속에서 ‘숲속 친구’와 함께 할 수 있는 루틴이면 삶을 더욱 풍성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줄 거다. 숲은 스스로 고독력을 키우는데 최고의 장소다. 숲속 사람들은 그래서 오랜 시간을 숲에서 자신의 삶을 즐기면서 동시에 홀로 고독도 즐기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