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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신령 Aug 10. 2024

그대여, '마음이 가난한 별'에서 만나

‘뜻밖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 선물이 10년 후 그대를 만나는 우주여행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뜻밖의 선물’이 나에게 상처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매일 숲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것도 아침이던지, 새벽이던지 상관없이 잠에서 깨면 곧장 떠나기로요. ‘뜻밖의 선물’은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는 ‘날이 선’ 것이었기 때문에 치유가 필요했습니다.     


  첫날은 새벽 2시 30분에 일어났습니다. 주저하지 않고 휴대용 플래시와 물 한 통을 챙겨서 집을 나서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모두가 잠든 시간, 새들마저 잠들어 있는 숲으로 간다는 게 살짝 두렵기도 했지만, 설렜습니다.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어떤 사람들을 만날지 궁금했습니다. 꼭두새벽 산으로 가면서 누군가를 만날 것을 기대하는 건 지나칠 수 있지만, 틀림없이 여행을 즐기는 어린왕자 같은 이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숲의 능선에 올라서자 도시는 화려한 야경을 자랑했습니다. 내가 사는 도시는 우리나라 3대 도시의 위용을 잃은 지 오래된 곳이지만, 야경은 달랐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아마도 어린왕자가 자신이 살던 B-612 별을 떠나 여행지를 지구로 잡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 어린왕자가 사막에 불시착한 게 안타까울 정도였습니다. 이 숲으로 왔다면, 그 어린왕자는 자신의 별로 돌아가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벽 숲속 여행에서 수많은 어린왕자들을 만났습니다. 모두가 어린왕자처럼 자신의 별에서 지구로 여행 온 우주인이었습니다. 

처음 만난 이는 ‘걷기별’에서 온 친구였습니다. 숲속 여행 첫날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습니다. 걷기별에서 나름 잘나가는 삶을 산 그는 인생 후반전을 보내기 위해 매일 새벽 3시면 지구로 여행을 온다고 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행성을 여행했지만, 지구만큼 걷기 좋은 곳이 없다는 겁니다. 지구의 숲은 걷는데 최적의 장소이면서 걷기만 하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신비한 곳이라고 엄지를 치켜세웠습니다. 그는 매일 하루 4~5시간을 이숲 저숲을 걷고서 자신의 별로 돌아간다고 했습니다. “걷기별로 오세요. 당신처럼 숲을 좋아하는 이들이 살기에는 너무나 좋은 곳입니다.”며 자신의 별을 한 것 자랑했습니다.     


  그다음 만난 행성인은 아마도 ‘소음의 별’에서 온 듯합니다. 행성의 이름이 ‘소음의 별’인지는 정확히 알지는 못합니다. 귀에 달팽이 같은 장비를 끼고 있어, 대화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행성 이름은 추측한 것입니다. 그는 우주의 시끄러움(노래일 수도 있는)을 듣지 않기 위해서 모든 소리를 차단한 채 여행하는 사람인 듯했습니다. 지구의 새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로 노래하는지, 새들의 노래와 고라니의 울음과 숲이 일으키는 바람이 숲속 친구인 바위나 나뭇잎을 만나서 공명을 일으키고, 그 공명이 더욱 아름다운 노래를 만드는 ‘숲의 신비’를 설명해주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는 가르침에 얽매여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는 이들과 너무나 닮은 듯합니다.     


  그러나 ‘춤추는 별’에서 온 여인과의 만남은 신났습니다. 지구별 스타 BTS의 팬클럽 ‘아미’들처럼 보라 유니폼을 갖춰 입은 여인들은 신나는 음악에 맞춰 한 것 춤추며 아침을 즐겼습니다. 보는 것만으로 흥겹고 어깨를 들썩이게 했습니다. 여인들은 눈빛으로 함께 춤출 것을 말을 했지만, 갈 길이 바쁘다는 핑계로 숲 정상을 향해 걷기만 한 게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춤추는 별’에서 온 여인들은 그 뒤로는 볼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지구인들이 춤을 그렇게 즐기지 않는다고 생각한 끝에 자신들의 별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침묵의 별’에서 온 노인과 만남은 많은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항상 숲 정상을 코앞에 두고서 내려가는 이유가 처음에는 너무 궁금했습니다. 인사를 하고 어느 별에서 오셨냐고 물어도 침묵했습니다. 표정으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입은 한사코 열지 않았습니다. 마치 ‘침묵과 고독’의 핵심 가치를 아는 게 삶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순간 멘토가 생각났습니다. 멘토는 젊은 시절 멋모르고 까부는 내게 항상 “너는 누구냐(who are you)”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철학적인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는 한 번도 제대로 된 답을 하지 못하고 땀만 삐질삐질 흘렸습니다. 인생 후반전을 시작하는 출발점에서 ‘침묵의 별’에서 온 노인에게서 이 질문을 다시 받은 셈입니다.      


  해답은 매일 숲속 여행을 통해 찾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10년 후 당신에게 갈 이 편지를 쓰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분간 멘토와 노인의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숲속 여행을 계속하겠습니다. 숲속 여행을 통해서, 그리고 침묵과 고독 속에서 가장 낮은 밑바닥을 향해 걸어간다면 틀림없이 그 해답은 보여줄 것으로 믿습니다. ‘걷기별’에서 온 사람의 말처럼 숲속을 걷기만 하면 숲이 알아서 그 길을 알려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숲의 신비한 힘을 나도 이제 믿기 시작했습니다. 답을 찾으면 나도 우주여행을 떠날 것입니다. 10년 후 당신을 만날 별을 찾아 떠날 계획입니다.     


  10년 후 당신과 만날 별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이름은 아마도 ‘마음이 가난한 별’ 일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별’은 당신도 알다시피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은 만나는 모든 이들이 서로를 존중하고, 자신과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보여도 이해하며 공감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저 일상을 작은 일에도 기뻐하며, 행복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갈 수 있는 별입니다. 나는 물론 아직 그 별에 갈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 숲속 여행을 통해서 그 가능성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날은 무척 더웠습니다. 푹푹 찌는 더위 속에 숲을 걷는 건 누구나 힘듭니다. 그날은 하필 해외여행을 다녀온 분과 함께 걸었습니다. 동유럽의 아름다움을 재미있게 설명하는 그분의 얘기는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덥고 힘들다는 생각이 꽉 차 있어, 다른 게 들어올 틈이 없었습니다. 매일 행복한 숲속 여행을 하고 있다고 수없이 떠들었는데, 힘듦만 있을 뿐 행복과는 먼 듯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걷던 그분이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 끝에 “우리는 행복한 숲속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잖아요.”라고 했습니다. 맥락도 모른 채 그저 ’행복한 여행‘이라는 말만 가슴 속에 콕 박히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순간 힘듦이 행복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치 스포이트로 한 방울 떨어뜨리는 순간 컵의 물 색깔이 바뀌는 것처럼. 10년 후 당신이 있을 ’마음이 가난한 별‘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 확신이 생겨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 그곳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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