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거움과 가벼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중심으로 <참을 수 없는 가벼움>, <깊이에의 강요>, <자칼과 아랍인>, <내기> 속에 나타난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각각의 작품이 정의하는 삶의 무거움은 전부 다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영원회귀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운명과 책임을, <깊이에의 강요>는 예술가에 강요되는 평가를, <자칼과 아랍인>은 동물성을, <내기>는 심연을 무거움으로 정의 내린다. 이들은 무거움에 대해 각자 다르게 정의 내리고 있지만, 이들 전부를 관통하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삶의 무거움은 숙명적인 것이며, 존재는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삶에서의 상승을 중요시하였다. 그는 가벼움을 추구해서 아이의 단계에 올라야 한다고 보았지만, 무거움과 가벼움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보다는 불가분의 관계로 이해한다. 그는 낙타에서 사자, 사자에서 아이가 되는 정신의 세 가지 변화를 이야기하였다. 낙타는 ‘인내심 많은 정신’이며, 무거운 짐을 가득 짊어진다. 이후 낙타는 사자가 된다. 사자는 자유를 쟁취하려는 존재이다. ‘너는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용, 즉 도덕·규칙·필연에 대항하여 ‘나는 원한다.’라고 부르짖는 존재이다. 하지만 ‘새로운 가치의 창조. 이것은 사자도 아직 이루지 못하는 일이다.’라는 구절처럼 사자도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지는 못한다. 사자는 이에 아이가 된다. 아이는 기존의 가치를 넘어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초인이다.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을 통해 ‘창조라는 유희’를 이루어낸다. 이렇듯이 정신의 세 가지 변화는 무거움에서 가벼움으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지닌다. 무거운 짐을 짊어진 낙타는 아이가 되어 창조라는 유희의 가벼움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힘에의 의지’가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아이가 되는 상승의 과정을 가능케 도와준다. 그러나 힘에의 의지를 통해 아이가 되더라도, 다시 영원회귀의 굴레에 의하여 다시 낙타가 될 수밖에 없다. ‘자갈들의 조롱에 찬 삐걱거리는 소리에도 (중략) 나의 발은 힘겹게 위로 향했다.’라는 구절처럼 낙타는 오솔길을 올라간다. 이 상승의 행위에 대해 ‘나’를 심연으로 끌어내리는 중력의 영, 난쟁이가 속삭인다. ‘그대는 자신을 높이 던졌으나 모든 던져진 돌은 반드시 떨어지기 마련’이라고. 즉 아무리 초인이 되어 가벼움의 단계에 이르더라도, 영원회귀에 의해서 아래로 끌려 내려와 무거움에 속박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여기에 차라투스트라의 우울이 존재하며, 영원회귀가 차라투스트라의 무거움이 된다. 그러나 영원회귀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차라투스트라는 고통에 매몰되지 않는다. 그는 웃으며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고 보며 고통을 긍정한다. ‘변화한 자, 빛에 둘러싸인 자로서 그가 웃고 있었다!’에서 볼 수 있듯이, 무거움이란 거부할 수 없는 현실이므로, 무거움 속에서 가벼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가벼움과 무거움은 서로 떨어뜨릴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사실을 긍정하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화자는 삶이 기본적으로 가볍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무거움도 배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유사하다. 화자는 차라투스트라와 달리 영원회귀에는 반대한다. 영원회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그렇기에 인생이란 한 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 가벼운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은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것이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가벼움만이 진리는 아니며, 가벼움에 경도된 삶이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묵직함은 진정 끔찍하고, 가벼움은 아름다울까?’,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디론가 날아가 버려, (중략)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라는 구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인생이란 기본적으로 가벼운 것이긴 하지만, 무거움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또한 화자는 등장인물의 삶을 통해서도 무거움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소설 속에는 무거움과 가벼움을 대변하고 있는 인간상이 나타난다. 가벼운 삶을 영유하고 있는 토마시는 무거움을 상징하는 테레사에게 이끌린다. 그는 테레사를 ‘강물에 버려진 아기’라고 보며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사랑과 무거움을 느낀다. 반면, 누구보다도 가벼운 삶을 살아가던 사비나는 표리적 관계의 공허함을 느끼며 가벼움의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듯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은 등장인물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이 어떻게 불가분의 관계로 엮여있는지를 드러낸다.
<깊이에의 강요>, <자칼과 아랍인>, <내기>의 등장인물 역시 삶의 무거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이다. <깊이에의 강요>의 젊은 예술가는 무거움에 압도되어 밧줄 위에서 추락한 인물이며, <자칼과 아랍인>의 자칼은 사자의 면모를 보이지만 결국 아이의 단계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마지막으로 <내기>의 변호사는 아이의 단계에 이른 초인이지만, 그 역시도 무거움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깊이에의 강요>는 무거움에 압도당한 젊은 예술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깊이에의 강요> 속의 ‘깊이’는 평론가나 대중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요소이다. 그들은 예술에 깊이가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하며. 깊이가 없는 젊은 여인의 작품을 비평한다. 그러나 사회로부터 강요되고 있다는 점에서 ‘깊이’는 오히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용’, 즉 ‘너는 해야 한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깊이’는 사회의 규율·규칙이며, 사자가 ‘나는 원한다’라고 이야기하며 저항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즉, ‘깊이’는 예술가를 구속하고 있는 무거움이다. 예술가는 본질적으로 누군가에게 평가받는 직업이다. 그러므로 젊은 여인이 깊이에의 강요, 그 무거움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 말미의 평론가는 ‘분명 헛될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피조물의 반항’. ‘숙명적인, 아니 무자비하다고 말하고 싶은 그 깊이에의 강요’라고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깊이에의 강요가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숙명적이며 벗어나지 못하는 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이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전부 깊이 있다고 인정받지만, 작품 속 어느 누구도 그들이 왜 깊이 있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비평을 외우고나 있는 듯이’ 공적인 평가를 신뢰하지만 이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이것이 예술가에게 강요되는 무거움이다. 무거움 자체를 거부할 수는 없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앞의 두 작품과 공통점을 지닌다. 그러나 무거움에 대응하는 모습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젊은 여인은 사자의 정신을 갖지 못하였기에 무거움에 저항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타자가 자신에 대해 내린 정의를 본인의 것으로 받아들였고, 무거움에 압도되어 말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자칼과 아랍인>에서의 자칼은 <깊이에의 강요>의 젊은 여인보다는 무거움에 더 잘 저항한 등장인물이다. 자칼은 동물적·원시적 구문화를 상징한다. 그들은 ‘가진 것이라곤 이빨밖에 없는’ 짐승이다. 주둥이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비위생적이고 문명에서 벗어난 존재이다. 자칼은 아랍인으로 대표되는 이성·합리의 질서를 거부하고 자유를 찾고자 한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아랍인에게서 벗어나 평화를 누려야 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속의 정신의 세 단계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유를 찾아 저항하는 사자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견 사자의 면모를 보여준 자칼의 투쟁은 실패로 돌아간다. 아랍인이 낙타 사체를 던져주자, ‘아랍인을 잊고 증오도 잊은’ 상태로 낙타 사체를 물어뜯는 데에만 몰두한다. 동물성에 종속되어 아랍인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본능만 남게 된 것이다. 이성과 합리의 신질서에 저항하여 자유를 얻고자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추구하는 동물성 자체가 자유를 방해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 자칼에게 있어서의 무거움이다. 또한 자칼이 그들 스스로 자유를 쟁취해 내려 하기보다는, 유럽인이라는 존재에 기대려 한다는 점에서 자칼의 저항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자칼의 무거움이자, 중력의 영에 의한 속박이다. 결국 자칼은 ‘반쯤은 도취와 무기력 상태에 빠진 채’ 채찍에 맞으며 무거움에 압도된다. 결과적으로 <자칼과 아랍인>에서도 무거움은 벗어날 수 없는 요소로 등장한다.
<내기>의 변호사는 <깊이에의 강요>, <자칼과 아랍인>과는 비교할 바 없이 진보한 사람으로, 차라투스트라가 언급한 정신의 세 가지 변화 중 ‘아이’의 단계에 이른 존재이다. 변호사는 ‘그대들은 분별을 잃고 잘못된 길을 걷고 있다. 그대들은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고 추악한 것을 미로 받아들이고 있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규정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사자처럼 세상의 규칙과 규율을 거부한다. 변호사의 변화는 사자에서 그치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규범·규칙을 향유하는 주체였다. 그러나 이후 ‘기적을 창조하고, 살인을 하고, 도시를 불태우고, 새로운 종교를 설파하고, 완전한 왕국을 정복하기도’ 하는 등 선악의 기준을 스스로 정하는 주체인 아이이자 초인으로 거듭났다. 변호사가 내기를 그만둔 방법에서도 아이의 면모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내기의 규칙에서 정한 것처럼 ‘문턱을 넘는’ 방식으로 내기를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규칙의 속박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법을 창조해 냈다. 바로 ‘창문을 통해 빠져나온’ 것이다. 여기에서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규칙을 창조해 내는 아이의 면모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렇게 아이의 단계까지 나아간 변호사조차도 무거움의 굴레에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내기>는 위의 작품들과 연결된다. 변호사는 가벼움과 무거움을 모두 경험하였다. ‘향기로운 술을 마셨으며, (중략) 날개를 만져 보기도 했다.’와 같이 책 속의 낭만적·신화적 요소들을 향유하며 가벼움을 경험하였으며, ‘바닥 모를 심연에 몸을 던지기도’ 하였다. 그가 심연이라는 무거움에 몸을 던진 후에야 규칙을 만드는 지배자이자 선악의 기준을 정하는 주체가 될 수 있었던 사실에서 인간이 ‘무거움’을 거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밀란 쿤데라가 이야기한 것처럼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의 모순은 신비롭고 미묘하다. 가벼움은 무거움이, 무거움은 가벼움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으며,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할 수도 없다. 위에서 다룬 다섯 작품은 전부 무거움의 본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해 다루고 있다. 각각이 무거움을 무엇으로 정의 내리는지, 또는 무거움에 어떻게 대응해 나가는지에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가벼움을 추구하되, 무거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본질에 대해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프란츠 카프카, 『자칼과 아랍인』
안톤 체호프, 『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