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및 작품 분석, <인형의 집> 외 6편

by 박현민

1.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보들레르의 '악의 꽃' 중 <시체>와 산문시 '파리의 우울' 중 <군중>,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토대로 분석한 19 세기 유럽문학의 특징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보들레르의 <시체>와 <군중>,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모두 과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사회적 인식, 통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즉, 기초의 가치와 전통을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은 당시 성스러운 것, 불가침적인 것으로 인식되던 결혼과 가정이라는 결속체에 의문을 제기한 작품이다. 당시 19세기 유럽에서 가정은 시민사회의 기초 단위로 인지되었다. <인형의 집>은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을 전면에 등장시키고, 그 가정이 붕괴하는 모습을 그려내며 기존의 사회 통념에 파문을 일으킨다. 주인공인 노라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비밀을 간직해 온 인물이다. 그러나 그 비밀이 탄로 나게 되자 남편인 헤르마는 노라를 비난한다. 그는 ‘우선은 역시 종전대로 지내지. 하지만 물론 세상 사람들 앞에서만 그대로 보이기 위해서야.(p.128)’라고 말하며 그들의 결혼 생활이 단지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를 통해 노라는 그들의 결혼이 진실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헤르마를 떠나려고 마음먹게 된다. 그러자 헤르마는 ‘신성한 의무를 다할 수가 없다.(p.138)’라고 이야기하며 노라를 비난한다. 신성한 의무란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의무를 의미한다. ‘신성하다’는 표현은 오히려 사회가 여성에 부여한 역할이자 짐의 무게를 역설적으로 드러내준다. <인형의 집>은 단순히 여성의 역할이나 결혼 제도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데에서만 멈추지 않는다. 노라는 헤르마와의 결혼 생활이 붕괴하는 것을 보며 다른 여러 가지 사회적 통념에 대해 의혹을 갖게 된다. ‘세상에서 말하는 것이나 책에 써 있는 것으로 이미 저는 만족할 수 없게 되었어요.(p.138)’, ‘종교란 것이 무엇인지, 저는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p.138-139)’, ‘법률이란 것이 제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 같지 않다(p.139)’ 등의 대사에서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보들레르의 <시체>는 과거에 통용되던 전형적인 문학의 모습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다. 종교에 의존하며 아름다움을 그렸던 문학의 모습에 의문을 제기하며. 적나라함과 냉혹한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시체>는 죽음의 끔찍함을 아름다움 없이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전까지의 문학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그러나 <시체>에서의 ‘썩은 냄새 가득 풍기는 배때기(p.85)’, ‘검은 구더기 떼(p.86)’ 등의 표현은 ‘화창하고 아름답던 여름 아침(p.85)’, ‘만발한 꽃들과 풀(p.87)’ 등의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며 오히려 섬뜩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시체>의 두드러진 특징은 예술의 독자성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썩어 문드러져도 내 사랑의 형태와 거룩한 본질을 내가 간직하고 있었다고(p.87)’에서 ‘사랑’은 삶의 본질을 뜻하며, ‘사랑의 형태’는 예술과 문학을 의미한다. 즉 삶의 본질이 예술을 통해 구원된다는 인식을 나타내고 있다. 문학의 윤리적이며 종교적인 구속에서 벗어나며 그 권위를 예술이 대체하고 있는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군중>에서도 그전까지의 문학적 기조나 사상과 대비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군중>에서의 시적 자아는 통일되어 있지 않고 분열적인 모습을 보인다. ‘시인은 제멋대로 자기 자신일 수도 있고, 동시에 타인이 될 수도 있는(p.75)’ 그전까지는 인간이 자아의 분열에 불쾌감을 느끼고, 통일된 자아 하에서만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었다. 인간과 인간이 1:1로 만나는 인간적인 관계가 선호되었으며, 순간적인 것은 덧없으며 허무하다 하여 배격되었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군중>에서 자아의 통일성에 저항하며, 또한 비인간적이고 집단적인 만남에 도취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온갖 사람과의 이 교류 속에서 어떤 독특한 도취를 끌어낸다.(p.76)’ 그는 ‘사람들이 사랑(p.76)’이라고 부르는 인간적인 개인의 만남보다 ‘영혼의 성스러운 매음(p.76)’을 갈구한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역시 합리적이며 인간을 새로운 발전의 단계로 끌어올려줄 것이라고 생각되던 과학과 이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의 합리성 하에서 시체를 이용해서 생명체를 창조할 수 있다고 믿고 괴물을 만들어냈다. 즉, 괴물은 과학의 산물이며 동시에 이성의 이면을 나타낸다. 또한 프랑켄슈타인이 만들어낸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피조물이며 동시에 분신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다시 이분법적 틀의 역전이 발생한다. 괴물의 말에서 이를 엿볼 수 있다. ‘나는 싫어하면서도 거스를 수 없는 충동의 노예였지 주인이 아니었소.(p.291)’는 주인과 노예의 역전을, ‘악은 나에게 선이 되었소.(p.291)’는 선과 악의 이분법을 뒤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주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기존의 가치관을 뒤흔든다.

결론적으로 <인형의 집>, <시체>, <군중>, <프랑켄슈타인>은 기존의 가치와 전통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들이 역전시키고자 하는 기존의 가치관, 인식, 통념은 각자 다르다. <인형의 집>은 노라라는 등장인물을 통해 기존의 가부장제와 가정과 결혼의 전통적 가치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한다. <시체>는 기존의 종교적이며 윤리적인 문학의 틀을 벗어나서,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적나라한 문학의 모습을 그리며 예술의 독자성이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 <군중>은 통일된 자아가 완성적이라는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며 분열적 자아 하의 도취적이고 비인간적인 만남을 긍정한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을 통해 시적인 것을 강화하며 시인으로서의 자아를 강조하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이성과 과학이 만들어낸 괴물의 존재를 통해 이성의 이면과 위험성, 근대적 욕망의 섬뜩함을 보여준다. 각각이 다른 주제를 강조하는 듯 보이더라도, 기존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인식의 지평을 열어나가고 있다는 점에서 19세기 유럽 문학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2. 레싱의 <현자 나탄 >에 나타난 계몽주의 정신


임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계몽이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의미한다. 즉, 각성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싱의 <현자 나탄>은 등장인물인 나탄을 통하여 계몽주의적 덕목을 드러내고 있다. 술탄인 살라딘은 나탄을 시험해 보기 위하여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세 종교를 비교하라는 문제를 낸다. 나탄은 이 문제에 직접 답을 하지 않고 ‘반지의 우화’라는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대답을 한다. <현자 나탄>은 사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 나온 소재를 인용한 것이다. 어떤 종교를 택하더라도 곤경을 넘기기 힘든 상황에서 다른 이야기를 가져와서 이에 비유한 것이 나탄의 지혜로움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데카메론>을 계몽주의적 관점에서 재수용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성의 한계에 대해 지적하였다는 점 때문이다. <현자 나탄>에서는 ‘재판관’의 존재를 등장시켜서 세 아들들에게 ‘자기 반지가 진짜라고 확실히 믿어라.(p.127)’라고 이야기한다. 그럼으로써 ‘자기 반지에 박힌 보석의 신통력을 현현시키려고 경쟁하라.(p.128)’라고 말한다. 재판관과 세 아들들 모두 세 개의 반지 중 가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반지를 진짜라고 믿으라고 한 것은, 완벽한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신의와 믿음으로 포용하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나탄은 ‘그 종교들은 모두 기록되거나 구전된 역사에 근거하지 않습니까?(p.125)’라고 하며 중요한 것은 ‘오로지 신의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p.125)’이라고 이야기한다. 즉, 맹목적인 믿음에서 벗어난 것이다. 성서나 역사를 글자 그래도 전부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구전된 기록이라는 전제 하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분명 계몽주의적 정신일 것이다. 맹목적 믿음에서 벗어나 스스로 생각하는 가치의 중요성을 우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냈다는 것이 바로 <현자 나탄>에 나타난 계몽주의 정신의 문학화이다.

3. 셰익스피어의 <햄릿 >에서 구현된 17세기의 삶에 대한 생각 - 궁전세계와 관련지어-


17세기에는 ‘인생은 연극이다’라는 말이 자주 쓰였다. 이는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모를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의거한 것이었다. 이러한 의식은 <햄릿>에서 궁정 세계의 모습을 통해 잘 나타난다. 궁정 세계는 무질서로서의 역사를 대변하며, 음모와 감시, 부패의 공간이다. 궁정 안의 인물들은 모두 연기를 하며 자신의 속마음과는 다른 말, 행위를 한다. 햄릿은 거짓으로 광기를 연기한다. 그의 광기는 진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연기이기도 하며, 자신이 숙부인 클로디어스를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것이었다. 클로디어스 역시 속마음을 숨기며 연기를 한다. 연극인 <햄릿>에서의 등장인물들이 연기를 하는 모습은 현실이 연극일 수 있다는 17세기의 인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덴마크는 감옥’이라는 햄릿의 말에서도 세상이 하나의 무대라는 세계관이 드러난다. <햄릿>에서의 극중극 기법에서도 이러한 인식이 잘 드러난다. 극중극에서는 햄릿과 클로디어스의 입장이 뒤바뀌게 된다.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관찰하던 관객의 입장에서 복수를 하고자 하는 배우의 역할이 되는 것이다. 그는 현실과 환상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혼란을 광기라는 연기로 나타낸다.



4. 작품 말미에서 햄릿이 더 이상 분노와 번민 속에 우울해하는 자가 아닌 이유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과 그가 죽자마자 숙부와 결혼한 어머니의 태도에 분노한다. ‘약한 자여, 네 이름은 여자로다.(p.25)’라는 햄릿의 한탄이나 ‘이성 없는 동물이라 할지라도 더 오래 슬퍼했으련만(p.25)’에서 그의 분노와 우울이 드러난다. 그는 진실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있기 때문에 진실을 은폐할 수밖에 없다. 억눌린 상황에서의 분노가 광증을 거짓으로 꾸며내게 만든 것이다.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려 한다. 그러나 그의 분노는 이내 세상에 대한 혐오, 그리고 자기혐오적인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있음이냐 없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p.94)’는 세상에 대한 혐오, 그리고 자살 충동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혼란과 혐오의 감정은 <햄릿>의 마지막에 가서 다시 세상에 대한 섭리의 인식으로 확장된다. ‘누구도 자기가 무엇을 남기고 떠나는지 모르는데, 일찍 떠나는 게 어떻단 말인가? 순리를 따라야지.(p.199)’, 그리고 ‘남은 건 침묵일 뿐(p.206)’에서 햄릿이 기독교적인 섭리를 인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햄릿은 레어티스에게 ‘날 용서하게. 내가 잘못했어.(p.199)’라고 말하며 용서를 빈다. 더 이상 우울이나 분노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게 된, 섭리를 깨달은 자의 발언인 것이다.

5.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흑사병과 이야기의 관계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흑사병이 유행하는 상황에서 이를 피해 도망친 10명의 남녀가 별장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흑사병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양한 면모를 보여준다. ‘절제된 태도로 정갈한 음식을 먹는(p.25)’ 무리가 있는 한편, ‘실컷 먹고 마시며 즐기고 노래하며 주변을 돌아다니고 닥치는 대로 욕망을 채우는(p.25)’ 무리도 존재하였다. 도시는 ‘극도의 한탄과 불행에 빠져 신성한 것, 인간적인 것 또는 법도의 권위에 대한 경의가 땅에 떨어지(p.25)’게 되었다. 도시는 무질서하고 인륜을 찾아볼 수 없는 공간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살아남은 10명의 남녀는 이내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취하(p.35)’기로 한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이야기를 통해 ‘이성의 경계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추구할 수 있는 기쁨과 즐거움, 쾌락을 맛보(p.37)’기로 한다. 즉, 이들은 무질서하고 반인륜적인 현실의 무자비함에서 벗어나서 치유를 맛보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한 것이다.

흑사병이 창궐하는 도시는 비극과 불행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10명의 남녀는 이성의 경계 내에서 쾌활함과 기쁨을 향유한다. 이는 이야기의 힘을 통해서 가능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데카메론> 내에서의 흑사병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가장 중요한 장치로서 작용하며, 동시에 이야기가 주는 쾌활함과 대비되어 언어·담론의 치유적인 힘을 강조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헨릭 입센, 『인형의 집』

보들레르, 『악의 꽃』 중 <시체>

보들레르, 『파리의 우울』 중 <군중>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

레싱, 『현자 나탄』

보카치오, 『데카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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