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은 개인으로 존재하지만, 결코 홀로 살아갈 수 없으며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살아가게 된다. 의사 역시 하나의 인간으로 환자와 관계를 맺으며 의사로서의 본인 존재를 확인해 나가게 된다.
여기에 바로 저자의 고민이 존재한다. 어느 수준의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느 수준의 이해가 도모되어야 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저자의 고민은 의사와 환자의 거리 유지에서 야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의 원제인 ‘Do No Harm’이 이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환자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는 해악 금지의 원칙을 저자는 더 폭넓게 받아들인다. 그는 단순히 죽거나 죽게 내버려 두는 것만을 해악으로 보지 않는다. 설령 죽음을 맞이하게 되더라도, 어떤 방식의 죽음이 환자에게 최선일지를 그는 고민한다.
저자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며 ‘괜찮은 죽음‘이라고 느낀다. 동시에 대다수의 다른 환자들은 어머니와 같은 행운을 누릴 수 없음에 한탄한다. 책 전반을 통틀어서 저자는 환자가 ‘괜찮은 죽음’을 맞게 하기 위해 고민한다. 혹자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의사라면 응당 환자를 치료해서 삶을 영유하도록 하는 것이 옳은 행위 아닌지, 혹은 환자로 하여금 그 형태가 어찌 되었든 ‘죽음’을 맞게 하는 것이 과연 의사로서 정당한 행위일지. 그러나 삶을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괜찮은 삶이란 곧 괜찮은 죽음으로의 과정과 상통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저자는 환자가 괜찮은 삶- 즉 괜찮은 죽음을 누리도록 하기 위한 의사로서의 의사 결정 행위-decision making-에 대해 고민한다.
결국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바로 ‘무엇이 환자에게 있어 최선인가’이다. 단순히 최선의 삶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마저도 최선의 형태로 조형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괜찮은 죽음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당사자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한다. 여기서의 이해란 단순히 환자의 건강에 대한 이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환자의 나이, 가치관, 경제력, 가정환경 등 총체적인 면을 고려해야 한다. 성공의 여부도 불확실하고 예후도 좋지 않은 수술을 대하는 20대 환자와 70대 환자의 태도가 같을 수는 없다. 고통스러운 연명 치료를 거부하고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는 환자도 있을 것이며, 목숨만 붙어 있더라도 한 줄기 희망에 매달리고자 하는 환자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기 앞서 환자와 인격적 관계를 확립해야 하며, 환자를 단순한 의술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주체로 인정해야 한다.
그렇다고 의사가 환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냉정한 신경외과 의사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자식의 수막종에는 이성을 잃은 저자의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외과 의사가 같은 외과 의사를 치료하기 꺼리는 것도 의사-환자 간 거리가 지나치게 가깝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외과 의사가 같은 의사를 치료할 때 격렬한 불안을 느낀다. 환자와의 거리 두기라는 평소의 규칙이 무너져 자신이 따갑게 노출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p.298)
지나치게 가까운 심리적 거리는 의사의 이성적인 판단을 방해하게 된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거리가 의사와 환자 사이에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거리 두기 역시 좋지 않다. 의사는 필연적으로 환자를 대함에 있어 심리적 거리 두기를 하게 되는데, 이는 일종의 방어 기제이다. 특히 죽어가는 환자를 대함에 있어 이는 극대화되곤 한다.
그러고는 마침내 자기 보호의 방편으로 병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에게 일어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때는 환자와의 거리감이 필수적인데 만약 수련의로서 환자에게 무섭고 불쾌한 짓을 해야 하는 순간이라면 이 거리감은 더욱더 멀어지게 된다.(p.295)
특히 환자의 몰개성함은 의사의 거리 두기를 부추긴다. 저자 앞에 선 환자는 모두 같은 병원복을 입고 그를 대면하게 된다. 환자가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려왔는지, 그가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와는 상관없다. 흰 병원복 앞에서 환자의 개성은 매몰되고 그들의 정체성은 ‘환자’라는 범주안에 고정된다. 그렇게 몰개성 한 환자만을 마주하다 어느 날 수술대 위에서 긴급으로 실려 온 환자의 옷차림을 보고 의사는 놀라게 되는 것이다. 각기 다른 의복을 입고 있는 환자는 더 이상 몰개성에 매몰된 객체가 아닌, 환자이기 앞서 하나의 인간, 하나의 주체로 의사에게 다가오게 된다.
Well-dying의 관점을 단순히 인간으로서 존엄성과 품위를 지키는 것에 한정시키지 않고, 환자의 삶을 궤적을 통틀어 바라보는 저자의 가치관은 나로 하여금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수의사가 되어 환자를 대하는 나의 모습은 어떠해야 할 것인가. 의료인-수의사는 법적인 의료인이 아니지만 편의를 위해 이렇게 표현하겠다-은 환자의 힘, 그리고 능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환자에게 선택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이 관계에서 책임을 갖는 주체적인 대상은 환자가 되어야 한다. 의료인은 환자에게 생긴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존재이며, 이러한 관계 하에서만 의료인은 환자의 삶에 실존적인 참여가 가능하다.
그렇지만 수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보다 일견 단순해 보일 수 있다. 치료 행위에 있어 환자의 의견보다는 보호자의 의견이 우선시 되며,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는 선택 또한 환자 본인이 아닌 보호자에 따르게 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점에서 더욱 복잡 미묘한 관계가 탄생한다고 생각한다.
무엇이 환자에게 있어 최선일지 고민하기 위해 고려할 수 있는 많은 점이 수의사와 환자 간 관계에서는 무의미해진다. 환자와 라포 rapport를 쌓기도 힘들며, 환자에게 본인의 의견을 직접 물어볼 수도 없다. 수의사는 환자의 삶의 궤적을 보호자라는 일차적 필터를 거친 채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몰개성의 측면에서 이는 더욱 심화된다. 대화나 라포 형성이 불가능한 환자는 각각의 주체로 인식되기 쉽지 않다. 그리하여 수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조력자와 도움을 받는 관계보다는 주체-수의사-와 대상-환자-의 비대칭적 관계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이러한 결과에서 벗어나서 어떤 모습의 수의사가 되어야 환자와 실존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 과거 국어 교사로서 느꼈던 고뇌의 형태와 비슷한 고민을 나는 지금도 하고 있다. 결국 이런 고민은 국어 교사이든 수의사이든 타자와 밀접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직업을 선택한 나의 몫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