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얼굴> 그리고 멸시, 자기방어, 그리고 윤리의 붕괴에 대하여
“그 연놈들이 날 놀려 먹고 있었구나.”
이 문장은 깨달음이 아니라 붕괴에 가깝다.
오랜 시간 축적된 무시와 비웃음, ‘예쁘다’는 기준에서 밀려난 얼굴에 붙은 평판들, 농담이라는 이름의 폭력, 사회적 멸시가 한 인간의 내면에서 임계점을 넘는 순간이다.
우리는 흔히 폭력을 순간의 충동으로 설명하지만, 사실 폭력은 거의 언제나 지속적인 멸시의 결과다.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 ‘얼굴’은 생물학적 형상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향해 말 걸어오는 타자의 존재 자체”, 나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윤리적 사건이다.
얼굴은 이렇게 말한다.
“나를 죽이지 말라.”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얼굴은 점점 다른 의미로 소비된다.
얼굴은 평가되고, 점수화되고, 비교된다.
예쁜 얼굴, 못생긴 얼굴, 믿을 만한 얼굴, 웃음거리가 되는 얼굴.
이 순간, 얼굴은 더 이상 윤리의 출발점이 아니라 멸시의 대상이 된다.
놀림은 사소하게 시작된다.
무시는 농담처럼 포장된다.
비웃음은 “다들 웃는데 왜 예민하냐”는 말로 정당화된다.
하지만 이 반복은 한 인간에게 이렇게 속삭인다.
너는 존중받을 자격이 없다.그때부터 인간은 자기방어를 시작한다.
문제는 이 방어가 점점 윤리를 닮은 폭력으로 변형된다는 점이다.
나를 멸시한 세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더 이상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해
‘정상적인 얼굴’을 되찾기 위해
주인공은 가장 가까운 타자를 제거한다.
아내를 죽임으로써, 그는 멸시의 세계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레비나스의 언어로 말하자면,
이 행위는 타자의 얼굴을 완전히 부정하는 순간이다.
멸시는 살인의 연습이다
우리는 살인을 혐오하지만,
멸시에는 지나치게 관대하다.
외모를 기준으로 한 농담
사회적 약자를 향한 조롱
“그 정도면 괜찮지 않냐”는 집단적 무감각
레비나스가 보았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멸시는 이미 윤리의 파괴가 시작된 상태라고.
살인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전에 반드시
얼굴을 보지 않으려는 연습,
타자를 사물처럼 다루는 훈련이 선행된다.
SNS, 미디어, 알고리즘의 시대에
얼굴은 끊임없이 노출되고, 평가되고, 왜곡된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 많이 본다.
그러나 너무 적게 만난다.
레비나스적 의미의 ‘얼굴’—말 걸어오는 타자의 취약함, 부서질 수 있음, 나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존재—
은 이 속도 속에서 자주 실종된다.
레비나스의 윤리는
“이해하라”가 아니라
“멈춰라”에 가깝다.
웃기 전에
평가하기 전에
이름 붙이기 전에
한 인간의 얼굴 앞에서 잠시 멈추는 것.
그 멈춤이 실패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왜 그런 짓을 했을까”라는 뉴스 제목을 읽게 된다.
그러나 질문은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그 얼굴을, 정말로 본 적이 있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