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진정 찾고 있는 것
나는 홀로 존재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언제나 다른 사람 속에서 살아간다. 시선, 말, 손길 하나가 나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독백만으로는 살 수 없다. 우리는 타인의 응답 속에서만 온전히 ‘나’가 된다.
인류가 이어져 온 힘도, 어쩌면 이 끝없는 타인 추구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내가 무너지는 순간에도 나를 다시 일으키는 것은 언제나 만남이었다. 그 극적인 형태가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존재를 흔들고, 동시에 안식처를 내어준다.
영화 〈너를 보내는 숲 The Mouring Forest〉에서 치매를 앓는 노인 시게키는 스님에게 묻는다.
“나는 살아 있습니까?”
그에게 살아 있다는 말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존이 아니었다. 밥과 반찬을 먹을 수 있는 육체적 기능만이 아니라, 영혼에서 우러나는 감각, 마음의 교류가 있어야 비로소 삶은 ‘살아 있음’으로 이어진다.
이 물음은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현대인은 내면의 외로움에 흔들린다. 타자와의 관계가 단절된 삶은 공허를 남기고 의미를 소멸시킨다. 살아 있다는 것은 결국 누군가와 함께 숨 쉬고, 서로의 말을 건네는 순간에서 확인된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음악혐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 사회는 자신의 언어를 제 거처로 삼는다. 제 몸을 보호해 줄 바다나 동굴, 산꼭대기, 숲이 아니라, 서로 주고받는 목소리가 그들의 처소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곧 인간이 거주하는 집이자 안식처다. 집이 벽과 지붕으로 몸을 지켜주듯, 언어는 고독으로부터 영혼을 지켜준다. 타인의 목소리가 다가올 때, 우리는 비로소 고립에서 벗어나 존재의 자리로 돌아온다.
나는 나를 둘러싼 다른 사람들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들의 눈길, 목소리, 손길은 보이지 않는 벽이자, 내가 머물 수 있는 안식처다. 철학은 삶의 추상적 사유 이전에, 아주 작은 행동 속에서 시작된다. 손을 잡는 일, 안부를 묻는 일, 귀 기울여 듣는 일. 그 소박한 행위가 곧 살아 있음의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