될성부른 프롤로그
될성 부른 프롤로그
노상 띨띨하게 굴더니, 꼴 좋다. 마치 스텐 프라이팬에 거뭇하게 늘러붙어 도저히 먹을 수 없게 된 계란 후라이 같은 기분이다. 식용유를 들이부어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연기는 자욱한데, 믿었던 노른자마저 눅진하게 터져 버렸다. 젠장. 쫑이다. 기분이 대충 더럽다. 불안장애를 앓는다는건, 주저앉아 닭똥같은 눈물만 뚝뚝 떨구고 있는 어린애를 가슴 한켠에 품고 사는 기분이다. 불안과 무력감에 푹 파묻혀 사는 기분이란 좋을수가 없는거다. 이리 차고도 넘치니 인생에 망조가 들었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내가 졌다. You win~!
나는 중증 공황장애(불안장애)와 성인 ADHD를 앓고 있는 은둔형 뇌질환자이다. 전업주부임에도 불구하고 살림솜씨는 두눈뜨고 봐줄수가 없는 지경이고, 대인기피성향까지 옹골차니 이건 팔방미인이 따로 없다. 이쯤되면 모두가 "그렇담 댁의 남편은 성인군자인 것인가" 라고 물어와도 딱히 부정할 형편이 못된다.
이 쓰레기같은 기분으로 눅진한 온종일을 버텨낸다. 하나님께서 날 내다 버리신게 분명하다. 멘탈이 곤죽이라 기분이 엿같다. 슬라임처럼 끈적대고 질척한 그 무엇인가가, 필시 내 대뇌 어딘가에 늘러 붙어있음에 틀림이 없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기를 쓰고 어른인척 살았는데, 결국 더는 버티지 못하고 기운이 바닥나 버렸다. 이제 이 누추하고 덜 자란 알맹이를 드러내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래요~ 어리버리 허접쓰레기가 나에요. 사실 내 진짜 모습은 엄청 구리답니다. 엉엉엉."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분골쇄신하여 끝까지 '어른 연기'에 혼신의 힘을 다해 살아갈 작정이었다. 누구에게도 뽀록나서는 안되는 나만의 늪에 빠져 매일 꼴딱 꼴딱 점점 가라앉아감을 느끼지만, 겉으로는 결코 나의 쪼다같은 덜자란 면모를 세상에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이값 제대로 하며 진짜로 조금은 더 버틸수 있을줄 알았다.
그런데 이 사태를 어쩐담. 나는 매일 매일 감당하기 힘든 막연함에 가로막혀 실시간으로 무기력과 싸우고 있다. 치열하다. 나의 멘탈. 유혈이 낭자하다. 나의 부실한 코어가 슬슬 밑천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는 더 버틸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오랜 침잠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이 깊은 불안과 은둔의 늪에서 벗어나야만 한다.
크리스천이 다른 질병도 아니고 공황장애라니, 우울증이라니. 이런 쪽팔림이 없다. 누가 알까 무서울 지경이다. "하나님!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건데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이따위 공포병에 휘둘려 십년이 넘도록 은둔중이라면 도대체 누가 기독교를 소망의 종교라 생각할까. 남들처럼 전도는 못하고 다닐지언정 이런 개망신의 주역이 되다니..... 먹칠하는 존재로서의 나라는 인간은 역시 야매이자 민폐덩어리가 분명하다. 내 신세가 이지경이라고 해서 나따위가 하나님의 명성에 누를 끼치게 될거라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역시나 그건 너무 단순하고 미성숙한 생각일것이다. 오랜 신앙교육을 통해 나도 그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 깊은 열등감은 매일 나를 휘저어 분탕질을 해 댔다. '넌 신의 수치일 뿐이야!'. 나는 긴 시간을 수치심과 열패감에 사로잡혀 어쩔줄 몰라했다. 그러므로 내가 뜻하지 않게 크리스천임을 드러내야할 일이 생긴다거나, 같은 교인과 마주치는 일이 생긴다는것은 내게 공포 그 자체였다. 나는 더욱 깊이 은둔으로 빠져들었다.
누군가의 재기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었던 기억이 있다. 그는 노인이었고 그리 건강하지 못했으며 딱히 주목할만한 재주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는 체급이 다른 불행을 통과하는 중이었다. 나와는 장르 자체가 달랐다. TV화면속에서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나는 어렴풋이 희망을 떠올렸다. '저런 악조건 속에서도 딛고 일어서는데 나라고 왜?' 나도 모르게 그에게 진심어린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마치 나 스스로를 응원하듯.
그 노인에 힘입어, 나도 일어설 때가 되었다는 생각을 조금씩 키워 나갔다. 이제 나의 연약함과 치떨리는 초라함을 셀프로 뽀록내고, 한심함과 못났음까지 덤으로 커밍아웃 하기로 결심했다. 동시에 나의 비루한 발걸음도 그 정체를 드러내겠지. '망한' 크리스천이라는 사실 마저도. 아오...미쳐버리겠다. 죽도록 창피하다. '나로 인해 당신께서 개망신을 당하신다 해도 그건 하나님이 알하서 하세요. 전 이제 모르겠습니다'. 기실 멀쩡한 어른인척 연기하는 일에도 적잖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제는 그 간당간당하던 배터리마저 방전되어 버렸으니 별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울며 겨자먹기로 내안의 어린것를 까발려 버리기로 했다. 힘을 빼고 이제 그만 시원해져버리자. 어른인척, 건실한 크리스천인 척 연기를 계속 이어가기에는, 난 해도 너무한 탈진상태다. 연기도 기운이 남아 있을때나 하는거지, 내 인생의 밑천이 완전히 바닥난 이 마당에, 이제 더는 물러설데도 없다.
방전이다. 이제 자력으로는 단 한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영혼까지 탈탈 털려버린듯한 현재 스코어에서, '나 사실은 한참 덜 자란 인간이에요' 억지 자백을 아니할 수 없게 된거다. 오랜 은둔과 정신질환으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철저히 망가져버린 내 실체가 벌거벗겨지는 기분이다. 벼랑끝과 같은 이 판국에 창피함이나 챙기고 있다니. 한심함에 귓바퀴가 뜨끈뜨끈해온다.
나의 글은 일천하여, 제법 그럴싸하고도 드라마틱한 솔루션이랄게 담겨있지 못하다. 오랜 은둔과 침잠에서 어찌하면 벗어날 수 있는지 단 한마디 똑 떨어지는 정답으로 내놓지 못한다. 불안과 공포에서 어찌 놓여날 수 있는지 속시원히 꼬집어 말해주지 못한다. 그 재기의 노인도 나에게 훌륭한 힌트가 되어주었건만... 한없이 부끄럽다.
이 무진장한 쪽팔림을 감수하고 이토록 엉성한 나의 글을 세상앞에 부려 놓기로 결심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세상에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불안과 우울에 매몰된 사람들.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방에 숨어 손에 잡히지 않는 신을 원망하며 오늘도 깜깜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그들에게 나의 글이 가 닿아 약간의 환기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 사실 ‘위로’라는 단어가 몹시 맘에 들지 않아 '환기'라는 말로 대신한다. 상투적인 표현 지긋지긋 해. 나까짓게 누굴 위로할 수 있다고. 그저 가볍게 농담 따먹기나 하며 잠시라도 좀 시름을 잊어보자는 뜻이다.
십오년이 넘는 시간동안 칩거하며 나는 바닥까지 와장창 무너져 있었다. 물론 남들이 보기에는 별 문제없이 멀쩡해 보였을지라도. 나는 자존심이 너무 강해 위장과 연기에 능한 편이다. 징한 대목이다. 가장 사랑하는 남편 앞에서조차 나의 엎질러진 영혼을 들키지 않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동원해 살았다. 정말 하루하루 안간힘을 써야 했다. 사는 일에 대한 공포와 절망감으로 죽은것과 다름없이 보낸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나의 살아있음을 일깨워준 하찮은 움직임이 나의 마음 한켠에서 감지 되었다. 나의 글들은 바로 그 '작은' 움직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글은 나의 '미치도록 작고 미세한' 꼬물거림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너무 하찮아서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미미한 이 꼼지락거림이, 나같은 꼴통을 숨쉬게 만들어 주었다는 것을 이 글들이 증명해 줄 것이다.
섣부른 간증따윈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제 겨우 손끝에 뭔가가 닿았을 뿐. 아직도 아랫도리는 미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나에게는 희망이 중요했다. 내가 답답할 정도로 더디게 꼼지락대는 동안, 단 한번도 채근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곁에서 조용히 나를 지켜보아준 사랑하는 남편과 부모님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글과 함께 그림 비스무리한걸 중간중간 그려 넣기는 했으나, 나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니다. 어떠한 주제가 주어지던 상관없이 그 모든 상황을 쓱쓱 그림으로 구현해내는 그런 신박한 능력자가 못된다는 뜻이다. 하아.... '현타'가 쎄게 온다. 한마디로 내 그림은 후졌다. 글러 먹었다. 젠장. 나는 그저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고 있는 사람일 뿐이다. 목소리도 빈약하고 말주변도 시원치 않다보니 나의 성능좋은 메가폰이 되어 줄 수단이 절실히 필요했다. 낙서. 그래. 나의 마음을 낙서로 한번 풀어내어 보자. 그 후, 매일을 불안에 지쳐 울며 기도했고, 좀비처럼 또 또 또 쓰고 그렸다. 마음이 불안하고 괴로울때마다 덜덜 떨며 휘갈긴 낙서와 글들은, 내가 불안과 박터지게 싸웠던 나날들의 인증샷과도 같다.
나의 낙서들은, 해변의 드넓은 모래사장위에 'SOS'라는 거대한 글자를 새겨놓은 후, 텅빈 하늘에다 대고 마구 깃발을 흔드는 행위와 닮아있다. 그래 맞다. 조명탄! 나 좀 살려달라고 나를 좀 봐달라고 발악을 하다 하다, 막판에 악으로 쏘아올린 조명탄 같은 것이다. 그게 내 기도와 낙서들의 정체성이다.
불안하지 않은 상태가 어떤것인지 알지 못하는 나는, 심리적 고통으로 죽고 싶을때 마다 무언가를 그려 제꼈다. 불안에 목이 졸리다못해 어떤날은 숨도 잘 안쉬어졌다. 무언가 미친듯이 몰두할곳이 필요했고, 그게 날 살릴거라 생각했기에 나는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그러다 지쳐 쓰러지면 악의 악을 쓰며 기도했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실제로 몇몇 그림들은, 들여다 보고 있으면 당시의 고통이 떠올라 가슴께가 뻐근해 오기도 한다. 아이고 가슴이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는 바로 내 얘기였다.
또 아주아주 드물긴 하지만 몇몇 그림들에 대해서는, 꽤나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에 임했다고 말하고 싶다. 살벌한 불안이 계속되는 그 와중에도, 놀랍지만 희로애락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흥미진진한 분위기를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을때라던가, 외롭거나 열렬히 수다가 떨고 싶을때 그린 그림들을 보면 그러하다. 일상생활을 하다보면 아주 평범하고 익숙한 집안 풍경임에도, 그 속에서 뭔가 특별하고도 재미있는 이면을 우연히 발견할때가 있다. 대애박~! 그럴때 나는, 그런 내 느낌과 생각을 즉시 글과 그림으로 옮겨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미처 종이위로 붙들어 앉히지 못한 나의 생각은 애석하게도 '과제'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것들은, 그렇지 않아도 복잡한 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기 시작한다. 마치 분리수거되지 못한 우주 쓰레기처럼.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기도와 함께 쓰고 그리는 행위란, 성능 좋은 메가폰이자 타이레놀 같은 것이다. 기깔난 성능을 자랑하고 있있다. 나의 연약한 전두엽 뇌피질을 푹푹 찔러대는 불안과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잊게해주었다. 크나 큰 위로이자 기쁨이다. 이토록 꽉 찬 메타포로 넘쳐나는 나의 수다는 언젠가는 혼잣말이 아닌 왁자한 '진짜 수다'가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되고야 말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