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대차게 말아 먹기
인생 대차게 말아 먹기.
"네가 부러워 미치겠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헛웃음이 났다. (혹시 이런식으로 날 먹이는건가?) 어이없게도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진짜로 있었다. 정확히 말해 나의 이 유니크한 처지를 부러워하는 것이다. 짚이는 데가 있긴 하다. 자녀도 직업도 없이, 남편이 벌어다 주는 월급으로 집에서 얼렁뚱땅 살림만 하며 일견 편안한 생활을 누리고 있으니. 그들 표현처럼 이 얼마나 '팔자 늘어지는' 인생이란 말인가. 맞는 말이다. 단언컨데, 이런 삶을 누릴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야 이보다 더 호사스런 삶은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부러워하는 내 삶의 그 어느 지점으로 인해 내가 살벌한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이 문제지만.
불행히도 나에게는 커리어에 대한 징한 강박이 있고, 곰팡내 풀풀 나는 은둔의 삶을 살며, 무위(無爲)에 대한 질긴 불안이 있으니. 네가 나에게서 그토록 부러워하는 '팔자 늘어지는 삶'이란 애당초 물 건너갔노라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대꾸해주고 싶었다. '어지간하면 날 부러워 하지마~.' 허세가 아니다. 나는 하등 쓰잘데기 없는 무쓸모 인간이고, 무위는 마치 여름날 송충이처럼 나를 갉아 먹고 있었다.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망가져 너덜너덜해진 나의 마음에 대해 아는 사람은 나뿐인줄 알았다. 나는 항상 남편 앞에서조차 몹시 멀쩡하고 명랑한 척 연기했다. 그는 나를 진심으로 대했지만 나는 남편 앞에서 철저히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모양이다. 교회도 나가지 않고 사람을 전혀 만나지 않은 채 십년이 넘도록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면서, 어찌 내모습이 온전해 보일거라 여긴건지. 어처구니가 없다. 칸도 울고갈 나의 열정적인 메쏘드 연기가, 실은 그간 전혀 통해먹질 않고 있었던 거다. 언젠가 한번, 얼결에 "자기가 망가진건 다 나때문이야" 라는 말이 남편입에서 새어 나온적이 있었다. 일순, 우리 둘다 너무 당황해서 화제를 돌리기에 급급했지만 '나때문이야'라는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고 '망가진' 에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그는 이미 다 알고 있었던거다. 같이 사는 남자가 그걸 모를거라 생각했다니....
하나마나한 소릴랑 더 하고싶지 않다. 아무것도 이루고 있지 않은 삶이란 나에게 상상할 수도 없는 고통을 가져다주었다. 피가 철철 난다. 공황도 공황이지만 결혼 이후에 시작된 나의 기나긴 은둔의 이유도 무직상태의 내가 너무나 쪽팔렸기 때문이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진심으로 궁금했다. 내가 나인게 너무 괴로워 나 스스로를 집안에 가둬 버렸다. 나는 쓰레기다.
생뚱맞게도 모세가 어떤 기분이었을까 궁금했던적이 있다. 한때 원대한 꿈을 꾸었던 그가 애굽에서 도망쳐 다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기까지, 무려 40여년간을 장인의 양떼를 치며 '허송세월'을 하는 동안 그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하나님도 참 무심하시지, 그토록 한창나이엔 뭐하시다가 모세가 다 늙어버린 후에야 그를 부르셨을까? 40여년간 계속된 그의 부르짖음을 설마 못듣지는 않으셨을텐데 말이다. 모세의 진절머리 나는 절망과 체념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거스러미처럼 불편하거나 성가시게 느껴지셨기를 바라는건, 나 또한 하나님에 의해 잊혀지지 않았기를 갈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남편에게도, 가끔 집으로 밀고 들어오는 가까운 지인들에게도, 난 늘 수선을 떨며 애써 태연한 척 가장했다. 심지어 연기가 늘었다. 쓰레기이면서 쓰레기가 아닌 척 하는 일에 도가 터버렸다. "니네들이 몰라서 그렇지, 나도 꽤나 자기효능감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단 말씀이야." 그러나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가 나 스스로에게 독화살을 퓽퓽 쏘아대고 있었다. ‘난 허접한 인간쓰레기야.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고 살 가치도 없어. 겉으로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사실 마음속으로는 한심하기 짝이 없다고 생각하겠지. 남편을 갉아먹고 사는 무위도식 밥벌레라고 말야.’ 자책이 말도 못했다. 알고보니 나를 성큼성큼 갉아 먹던 그 송충이는 바로 나였던거다. 와그작 와그작.
무자녀 전업주부들의 거센 비난이 벌써부터 여기까지 들려오는 것 같다. 나의 지인들 중에도 나와 같은 무자녀 전업주부가 몇 있다. 그들은 나와 달리 내적외적으로 자기 개발에 충실하고, 운동과 미용으로 자기관리를 하며, 이웃들과 어울려 매일을 활기차게 생활하고 있다. "얼음!!!" 삶이 정지되어버린 채 십년이 넘도록 집안에 틀어박혀버린 사람은 오직 나밖에 없다. 오직 나만이 인생을 대차게 말아먹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 나는 그들을 보며 단 한번도 한심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 누구도 나처럼 은둔에 붙들려 있지 않았고, 불안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았다. 그들은 나와 달랐다. 하나같이 살림9단에, 무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똑같은 멸치 다싯물을 내도, 그들의 것은 "그래, 이맛이야~!" 명실상부 고향의 맛이 났고, 내것은 노골적으로 비리고 썼다. 나는 태생부터 삽질에 능했다. 이것은 일례일 뿐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맙소사~!)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재테크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앉아서 하는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 그들의 박식함에 혀를 내두를수밖에 없다. 낯설고 현란한 금융용어와 금융지식들이 총알처럼 눈앞을 날아다녔다. 어질어질했다. 거반 알아듣지 못했지만 대~충 알아 듣는척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니 내가 날려대는 비난의 화살은 오직 나만을 향할수 밖에 없는거다. 나는 무쓸모 인간이 더욱 확실했다.
무자녀 전업주부의 삶은 생각보다 쾌적하거나 안락하지 않았다.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주부로서의 일상을 영위하는 일에 어려움과 불편을 겪었는데, 이건 그냥 조금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대환장 파티였다. 청소와 집안의 정돈상태를 유지하는 일부터 그랬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스무배 가량의 에너지를 쓰고도 "청소 한거....맞...지~?" 이런 소릴 듣기가 일쑤였다. 그만큼 정리정돈에 대해 무능했다. 설거지도 매한가지. 매일 해야 마땅한 설거지임에도 나는 도무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설거지에 돌입하기까지의 골백번 한숨에, 있지도 않은 구들장이 다 내려 앉았고, 설거지가 끝난 후에도 주방의 너저분함은 신기할정도로 여전했다. 괜한 엄살처럼 들릴것이다. 나는 손대는 일마다 실패하거나 하나마나한 짓이 되고마는 참담함을 늘 겪었다. 사소한 집안일도 예외일수 없었다. 해봐야 표도 안나는 일을 매일 공들여 하고있다. 아주 일생이 삽질이다. 예나 지금이나 삽질에서만큼은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이 분야에서만큼은 감히 나를 능가할 인물이 없다.
일이 귀찮거나 하기 싫은 감정과는 극명하게 다른 무언가가, 항상 내 속에 질펀하게 도사리고 있었다. 이 강한 불안은 지극히 사소한 일도 어렵게 만들었다. 그것이 나의 일상이다. 식사준비와 청소, 빨래와 장보기는 내게 있어 작은 언덕이 아니라 태산 같은 허들인 것이다. 하루하루가 그저 버티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당시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병적우울, 중증 불안장애와 ADHD의 합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건 아주 나중이었다. 의사는 내 면전에서 상위 1%의 심각성을 운운했다. 하아.... 여적 한번도 학교성적을 가지고 상위권에서 놀아본적 없는 내가, 뭐 좋은거라고 이런걸로......
결국 나는, 나를 무위의 인간이라 일컫는다. 무위의 독성이란 참 대단한 것이어서, 이게 현재의 나를 빠득빠득 말려 죽이고 있다는 생각이 확연하게 들었다. 그럼에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론은 빠삭한데 현실은 예상과 많이 달랐다.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저 하루하루 말라 죽어가는 수밖에.
크리스천이 자기 자신을 무위의 존재로 여기고 스스로를 개쓰레기 취급하는 일은 분명 청개구리같은 몰지각일 것이다. 누누히 말하지만 나도 안다. 잘 알고 있다. 나의 몰상식은 여전히 이렇데서 드러났다. 머리로는 잘 알지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항상 비루했다. 존귀히 여겨야 마땅할 나자신의 영적 신분에 대해 심히 부당한 하대를 함으로써 볼썽 사나운 삶을 사는 것이다. 내 절친중 하나는, 그런 나의 상스러운 태도에 대해 예수님의 구속하심을 무의미하게 여기는 오류라고까지 말했다. 따끔한 지적에 일순 식은땀이 났다. 그날밤 나는 결국 매달리며 기도할수 밖에 없었다. 나의 배덕함에 대한 자책에서 자유로울수 없던 날이었다.
불행히도 나에게는, 이 미쳐 돌아가는 디지털 세상에서 직업인으로 살아남게 해 줄 자신감이나 자원이 실제로 부재했다. 나는 십수년째 놀고 있고, 직장생활을 하던 그 시절에도 삽질과 뻘짓은 여전했다. 죽을만큼 열심히 살았지만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언제나 루저였다. 미친척하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치고 나갈 재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한창 나이에 때 이른 경력단절을 겪게 되었나 보다.
낙오와 단절의 반복된 경험은 나로 하여금 더욱 커리어에 집착하게 만들었는데, 이제는 나에게 체념의 단계가 닥쳤구나 싶었던 적도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내 가슴속 지하 5층쯤 되는 곳에서는 그 집착이 사라지지 않은 채 여전히 고이 묻혀 있었다. 이게 죽지도 않고 산채로 고이 묻혀있다가, 잊을만 하면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그리고는 무력한 나 자신을 향해 죽도록 활시위를 당겨댔다. 식겁이다. 공포특집이 따로 없다.
무위의 독성은 비단 나 같은 경력 단절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얼마 전 노인문제에 관한 진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는 그 기사를 통해서 실제 우리 사회의 노인들이 겪고 있는 대표적인 문제가 빈곤, 질병, 외로움뿐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새롭게 알게 되었다. (아... 난 너무 대책없이 무식하다.) 그 기사는 이 무위(無爲)의 문제에 대해 상당히 심각하게 다루고 있었다. 개인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삶의 의지를 무차별적으로 상쇄시키는 원인으로, 가난과 질병과 외로움보다 더한 '무위'를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위(無爲) : 명사. 아무것도 하는 일이 없음. 또는 이룬 것이 없음.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이제부터라도 나는 아무것도 이루는것이 없는 이 진공의 상태를 벗어나 무언가를 도모해야 한다. 내 인생, 더 이상의 파투는 곤란하다. 너무 오래 주저앉아 있었다. 어디로 갈지를 정하고, 있는 힘을 다해 밀어 붙여야 한다. 무언가를 도모하는 일을 멈춘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는 그랬다. 뭐가 되었든 되어야만 하는 이유였다. 모세가 40년간 실패와 좌절의 땅에서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했던 성숙과 단단함을 어느새 배워갔듯, 나도 이 무위의 시간안에서 결국은 땐땐해져야 한다. 차돌처럼. 짱돌처럼.
(제목: 쫄지마)ㅡ아크릴 물감, 붓펜
고등부 주일학교 시절, 한 선생님의 고마운 말이었다.
그 당시 나는 지독히 내성적인 학생이었다.
누군가 내게 말이라도 걸어오면 필요이상으로 당황했었던 기억이 난다.
당황한 나머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말도 안 되는 이상한 대답을 더듬더듬 늘어놓곤 했었다.
'모두들 나를 이상한 애라고 생각할게 뻔해'
거의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자격지심 덩어리.
그런 나에게 그 선생님은 이런 말로 나를 응원하려 하셨던 것 같다.
결코 잊을 수 없는 크나큰 격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