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왜 쓰는가 왜 그리는가 왜 기도하는가

by 스티키 노트
(제목: 왜 쓰는가 왜 그리는가)ㅡ아크릴 물감

왜 쓰는가, 왜 그리는가, 왜 기도하는가


이 곰팡내 나는 은둔을 이제는 그만 쫑내버릴순 없을까 하여, 우지끈 몸풀기를 하고 있는 요즈음.

바지런히 집안을 오가며 청소를 하고, 인적이 드문 시간을 골라 늙은개를 산책 시킨다. 그러는 중간중간, 흥미로운 생각이 떠오를때마다 거실 한쪽을 차지하고 있는 테이블에 틈틈이 들러 끊임없이 뭔가를 끄적댄다.


뭘 하다말고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테이블로 부리나케 달려가 쓰고 그린다. 양치를 하거나 머리를 말리다 말고 갑자기 들고 있던것을 내팽개치고 우다다 달려가기도 한다. 급한 볼일을 해결하러 화장실에 갈때에도 혹시 몰라 간단한 필기도구를 챙긴다.


불행히도, 샤워를 하거나 머리를 감다가 뭔가가 파싯! 하고 떠오르면 그땐 별 뾰족한 수가 없다. 씻는일이 끝날때까지 잊어버리지 않기위해 '비맞은 중' 마냥 계속 중얼중얼 머금어 보지만 그건 별 도리없이 십중팔구 증발해 버린다. 애석하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계속 뭔가를 쓰고 그리는 일은, 이 일들이 오매불망 항시대기로 나를 대우해주기에 가능하다. 나처럼 적극적으로 늦되고 본격적으로 답답한 인간을 한정없이 기다려주는 무언가가 항상 내곁에 있다는 것. 이 사실이 어찌나 눈물나게 고맙고 다행스러운지. 별스럽게도 나는, 누가 그러란적도 없는데 24시간을 팽팽하게 긴장한채로 살고있다. 그런 나를 요만큼도 채근하지 않고 항상 느긋하게 기다려주는 크로키북이 있다. 나를 향해 24시간 무휴시스템으로 활짝 열려있어, 나같은 싸가지에게 언제든 찾아가도 되는 친구가 되어준다. 친정엄마의 너른 품속이 이보다 더 따스하랴. 늘 쫒기듯 허덕허덕 살아가는 나에게 이런 느긋한 친구를 허락하신 하나님을 생각한다. 그가 나를 잘 아시고 이 길을 가게 하신걸까. 쓰고 그리며 좀 사는것처럼 살아보라고 정녕 그가 이끄신 길일까.


내생애 최고의 악재가 전두엽이라면, 이 일그러진 전두엽을 장착한채 살아가야 하는 내 삶의 길 위에 주께서 허락하신 이 선물이 감사하여 나는 기도한다. 주께서 허락하신 삶에 '악재'란 없다지만, 나는 부득부득 불행이라 고집을 부린다. 이 불행이 버거운 나머지 나는 지금 내가 만든 감옥에 갇혀 모두를 거절한채 살아가고 있으나, 이 와중에 내게 허락하신 위안이 너무도 감사하여 할말을 잊는다. 나는 적어도 나의 멀쩡한 팔다리로 무언가 할수있는 일을 찾아낸 것이다. 낙서를 일삼다보면, 유려하진 않아도 제법 그림같은게 나올때도 있다. 푸념을 말로 풀어내다보면 제법 글같은게 나올때가 있다.


빛의 속도로 팽팽 돌아가는 이 지구별에서 정녕 발붙일 곳이 없었다. 나란 인간, 느리고 답답한 존재의 결정체. 그리고 티끌만한 자극이 들어와도 달팽이처럼 집구석으로 휘리릭 사라져버리는 그런 사회부적응자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가 없듯 달팽이인간을 위한 나라도 세상에 없기는 매 한가지. 어디하나 내어놓을 데 없는 초라하디 초라한 사람이다. 눈을 씻고 봐도 써먹을 데가 없다. 아무리 나자신을 아름다이 여겨보려 해도 봐줄만한 구석을 찾아내기란 쉬운일이 아니다. 그런 측면에서, 보기 드문 귀하디 귀한 존재인게 맞다.


나에게 있어 사회생활이란, 내게 없는 융통성과 순발력을 매순간 요구받는 일의 연속이었다. 억지로 환경에 나를 끼워맞추어 살아내다 보니 어느새 조금 나아지기도 했지만, 내 고유의 기질이 뒤집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쩌다 아주 드물게 적성과 관심사에 맞는 업무가 주어지면 주목할만한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런일들 때문에 그나마 직장에서 용케 잘리지 않고 버틸수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성과를 낸 일이 독이 된걸까. 잘못 과대평가된 나의 업무능력 때문에 내 힘으로는 처리불가한 일들이 자주 넘어오고는 했다. 매사가 그런식이었다. 매순간이 한계였다. 숨이 찼다.


인내심의 역치를 매일같이 넘나들며 나의 마음속에서 비릿한 피냄새가 배어 올라올때 쯤이면, 하얀 수건을 매단 항복깃발을 연신 흔들며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던질수 밖에 없었다. 그럴때마다 부모님은 나의 인내심과 자질이 부족하다며, 하나뿐인 딸의 유전자를 부단히 상대의 책임으로 돌리곤 하셨다. 이토록 진취적인 가족이라니.


나는 내가 왜 그럴수 밖에 없었는지 부지런히 설명하는 대신에 차라리 입을 다무는 편을 택했다. 직장일을 우습게 생각하고 싫증이나 잘 내는 사람으로 오인받는것은, 어쩌면 내가 감당해야 할 숙명처럼 느껴졌다. 누구도 설득시킬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버렸기 때문이다.


‘나도 살기위해 그랬어요’


남들의 기준으로 보기에 나는, 내 한계를 섣부르게 정하고 경솔하게 직장이나 자주 옮겨 다니는 메뚜기일 뿐이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의 나는, 어떻게든 삶을 견뎌내고자 마지노선에 서서 배수진을 친 병사였다. 뒤집힌 바퀴벌레처럼 몸부림치며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꼴딱꼴딱 넘어가던 나의 기도를 하나님만은 아실것이다.


나는 누가 뭐라해도 열심히 살았다. 항상 최선을 다해 살았다. 무기력한 모습으로 우울한 생활을 오래도록 이어가던 때에도 나는 수면위의 오리처럼 죽어라 발을 휘젓고 있었다. 더 깊이 가라앉지 않기 위해, 그리고 살아내기 위해 휘적 휘적 항상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본연의 기특함일지니. 비록 그것들이 남들의 눈에는 전혀 보이지 않았을 지라도 나와 신만은 알고 있다.


쓰고 그리는 일이란, 수많은 군중을 앞에 앉혀두고 스스로 긴장을 억누른 채 실시간으로 강행해야하는 ‘공연’이 아니다. 이 대목이 바로 나의 행복이다. 한순간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로 가혹한 벌점이 매겨지거나, 그간의 노력조차 무색해지는 그런 종류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는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운동선수나 연기예술인들을 나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꽉찬 긴장을 안고 살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자신의 경기나 공연을 실시간으로 훌륭히 완수한다. 그들의 감히 흉내낼수 없는 정신력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나는 쓰고 그리는 일을 부단히 하면서 그것으로 끝내는 것은 아니다. 느긋하게 시간을 가지고 내 사고의 결과물들을 거듭거듭 다듬고 손볼수 있음에 생각보다 큰 만족을 느낀다. 이 어찌 행복이라 아니할 수 있을까. 시간을 쪼개어서라도 내 이 행복을 마음껏 누리고 말겠다. 나의 혼란이 단순히 혼란의 산물로 종결되도록 두지 않아도 된다. 그 혼란조차 하나의 자원이 되어 내 인생의 알짜배기 자산으로 거듭날수 있도록 거듭거듭 수정하고 다듬어 낸다. 결국 '골백번 퇴고'의 결기를 다지며 이 글을 마무리하게 될 줄이야.


그리고 어느새, 쓰고 그리는 일은 나의 모든 감정에까지 확산된다. 고단하고 혼란스러울때 뿐만 아니라 짜증나고 환장할때, 익살스런 생각이 떠오를 때나 건방떨고 싶을때, 그리고 누군가와 죽도록 떠들고 싶을때에도 다를바없이 진가를 발휘한다. 내 크로키북 위에서 이루어지는 이 전방위적인 허용을 목격하라. 어떤 계획도 제한도 없이 마음 가는대로 휘갈기도록 내버려 두는 공간이란 이리도 아름답고 청순한 것이니.


왜 쓰는가.

왜 그리는가.

나에게 치유이자 행복이기에 오늘도 나는 부지런히 계속 쓰고 그린다.



작가의 이전글8.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