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17)

17. 문제적 전두엽과 다이어리

by 스티키 노트

(제목: 나의 다이어리) ㅡ유성펜

다이어리의 분실은 곧 패닉으로 이어졌다.






문제적 전두엽과 다이어리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밀려드는 생각들이 마치 활화산의 마그마처럼, 비좁은 머리통 속에서 마구 용트림을 한다. 진짜 문제는 내 머리통에 있다. 머릿속이 복잡해도 너무 복잡하다. 생각이 많아도 너무 많다. 말로만 들어가지고서는 이게 어떤 상태인지 상상하기 힘들것이다.


제아무리 엉망진창이라 해도 책상위는 정리하면 그만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물론 내 성향에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예닐곱 시간이면 충분하다. 멀끔히 해치울 수 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다시 엉망이 된다. 친정엄마의 표현을 빌자면 '난리 부르스'의 표본이라나.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지만, 어쨌건 중요한 문제는 한껏 어질러진 방이나 책상위가 아니다.


머릿속이 오만가지 생각들로 드글드글하게 엉켜있다. 이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을 정리하는것이, 내 인생에서 매일매일의 과제이자 화두였다. 아주 어릴때부터 주욱 그래왔던것 같다. ‘얼른 집에가서 생각을 정리해야 해!’ . 마음은 이리도 간절하건만 생각을 정리한다는것,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맛이 가버린 나의 전두엽이 이런일에 쉽사리 동조할 리 없다.


머리가 복잡해서 미칠것만 같을때 어떻게 해결봐야 하는지를, 처음에는 전혀 알지 못했다. 뒤엉켜버린 생각을 정리한다는것은, 내겐 마치 뜬구름을 잡는일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랐던거다. 보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통제불능의 일들을, 어리고 젊었던 내가 무슨수로 다루어낸단 말인가.


그러던 중 우연히 '내려받기'를 몇차례 시도해 봤다. 밀려드는 생각을 하나 하나 글과 그림으로 가시화시키는 작업이다. 이런 시도들이 머릿속을 단순화 시키는 일에 나름 도움이 되었다면, 그건 나만의 착각일까?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런식으로 가시화 시키는 행위가, 나에게 일종의 안도감을 주는것 같았다. 어느덧 메모광이 된다거나. 또는 내밷고 싶은 말을 머릿속에만 담아두는게 아니라, 바로바로 글로 표현하고 그림으로 그리는 등의 일들 말이다. 알량한 욕심일수도 있겠으나, 궁색하나마 뭔가 자구책이랄것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효과가 있었다. 극도의 불안이 조금씩 덜어져 갔다. 내 나름의 방법을 본능적으로 찾아낸 것이다. 자신을 지키는 생존본능이란건 비단 신체적으로만 드러나는게 아니라, 이런 생활방식으로 발현 되기도 하나보다.


수많은 ADHD인(人)들에게는, 자신의 장애를 넘어서기 위해 각자가 본능적으로 궁리해 낸 소소한 방법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각자의 그 방법들이 이렇게 닮아있다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재미난다.


나는 차츰 메모와 글, 그림등에 더욱 심취해 가면서, 마음 한구석이 다소 시원해지는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경험했다. 그리고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한 크기의 다이어리를 한권 장만했다. 그간의 모든 메모와 글들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지 않게끔, 다이어리에 집중적으로 옮겨 기입하기 시작했다. 틈틈히 간단한 삽화도 그려 넣었다. 어떤 아이디어가 번쩍 하고 떠오를 때마다, 주제를 가리지 않고 빠짐없이 스케치를 해 두었다.


언제나 내 주변에 사방 널부러져 있던 수많은 점착메모지들의 내용을 하나하나 다이어리에 옮겨 적었다. 집대성이란 말은 너무 거창스러우니 그래, '집약'이다. 그런후에, 곧바로 기능을 다한 그 색바랜 종이조각들을 와그작 구겨 하나씩 휴지통으로 던져 넣었다. 가슴속이 뻥 뚫린 듯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신선한 공기가 내 머리와 가슴을 식혀주는듯한 그 느낌을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그 얼마나 사랑하는지 상상하기 어려울것이다. 진심, 살것만 같았다.


흘려보낼수 없어 끝없이 주워섬겼던 수많은 메모조각들은, 언제든 꼭 해결해야만 하는 내 마음의 무거운 짐이고 숙제였다. 내가 잠시라도 머무른 곳은 점착메모지 나부랑이들로 항상 어질러져 있다. 마치 헨젤과 그레텔의 빵부스러기처럼. 나만의 그 흔적은 곧 나의 닉네임이 되어 평생 내게 붙어 다니게 된다.


포스트잇 쪼가리들이 싸그리 정리되었다. 그것들을 진작 한곳에 모두어 정리해 두었더라면, 가슴속 짐들이 결국 병이되는 불상사를 늦출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중요한건 '메모'와 '집약'이다


그런식으로 다이어리를 중심으로 한 주변정리가 시작되었다. 또한가지 중요한건, 메모할 사항이 떠오르면, 바로 그 자리에서 다이어리에 ‘곧바로’ 기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당장 하던 일이 다급하다고 해서, 기입하는 일을 잠시 미루고 머금고만 있다가는, 십중팔구 내용은 증발해 버린다. 사라진다. 다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 바로 그런 상황이다. ‘내가 뭘 잊은거지? 뭐였더라?’. 기억해 내지 못하면 미칠듯이 답답해진다. 잠은 천리 만리 도망가 버리고. 뻔히 이불킥이 예상되는 이런 상황은 애초부터 안만드는게 상책이다. 그렇지 않아도 삶, 오지게 힘들다.


대학시절, 한시도 빠짐없이 내몸처럼 지니고 다니던 다이어리를 교내에서 잃어버린적이 한번 있었다. 당연히 나의 생활은 벼락이라도 맞은것처럼 올스톱 되어버렸고, 나는 패닉에 빠졌다. 그만큼 그 다이어리에 내 생활의 모든것을 의존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세상이 거꾸로 뒤집힌 느낌이란게 그런걸까. 블록버스터 재난영화처럼 모든것이 일순,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일로 나는 걸핏하면 호흡곤란에 시달렸다. 식사를 하거나 잠을 자는 일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식은땀과 잦은 구토증세로 괴로웠다. 집 밖을 나갈수도 없을 만큼 모든생활이 철저하게 올스톱 되었다. 스물 두살 내인생은, 밤에 혼자서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걷다가 갑자기 만난 맨홀구멍 속으로 훅 꺼져들어간 느낌. 딱 그랬다.


다행히도 얼마후 기적처럼 먼곳을 돌고돌아 그 다이어리가 내게로 돌아왔다. 나는 거짓말처럼 다시 안정을 찾았다. 그 안에 있던 오만원 정도의 비상금과 함께 학생식당의 식권 몇장만이 사라진채로, 모든 내용은 고스란히 보존이 되어있었다.


‘만일 그때 그 다이어리를 찾지 못했더라면 결국 어땠을까?’ 다이어리 분실사건은 결국 웃지못할 헤프닝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이 대목은 상상도 하기싫은 그런 의문을 남겼다.


그 분실의 경험은 그후 나를 더욱 철통같은 메모광의 길로 인도했다. 그리고, 항상 정기적으로 다이어리의 내용을 백업해두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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