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성향(단독자의 삶으로 정신무장)
철학에 관하여 문외한인 나에게 어떤 누군가가 ‘단독자의 삶’의 필요성을 역설한 적이 있었다. 단독자? 홀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어차피 인간은 혼자 살지 않는가? 등 이 개념을 처음 들었을 때, 어색하기도 하면서 친근하기도 하였다.
나이가 들고 이 개념에 친숙해지면서 키에르케고르라는 덴마크의 철학자를 알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실존을 자각하여 절대자인 신을 믿고 신앙을 얻는 모습에 관한 개념으로 ‘단독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단독자’라는 말은 참 멋있다. 홀로 살아감으로써 본인의 신념에 확신을 더하고, 보이지 않는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확고한 의지와 믿음 없이는 어렵다. 나에게 이러한 삶의 형태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내 생각과 행동 등을 정당화시키는 개념이었다.
홀로 살아가는 삶의 즐거움과 편안함, 그리고 철학적으로 이러한 삶의 모습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개념을 가진 나로서는 심리적으로 더욱 혼자 살아가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받은 각종 상처와 아픔은 혼자 풀어내고 극복하였다.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불필요하게 생각하였고, 친하게 지내던 관계가 언젠가는 끊어지고 나 혼자 살아간다는 생각에 사람들과 관계를 쉽게 생각하였다. 이러한 삶의 모습들이 강해지면서 내 주변인들로부터 다양한 오해를 받곤 하였다.
나를 오해한 사람도 있는 반면, 나를 이해한 사람도 있었다. 다행이었다. 사회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고, 그 관계의 중요성을 느끼게 해 준 계기였다. 나의 불통과 독단 등으로 보이는 행동의 결과들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고, 그 이면에 나타난 원인을 보려고 하고 그것을 토대로 나를 해석한 많은 사람이 있었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나는 사회적 관계를 절단하고 진정한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을 것이다.
고립 친구들을 만나면서 나의 과거를 되새겨본다. 그리고 이들이 왜 이러한 모습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원인을 보려고 한다. 이들의 은둔적 삶은 결과이지만, 그 결과를 만들어낸 원인을 보고 이해하고 싶다. 과거 나에게 베풀었던 많은 사람의 이해심을 나도 이들에게 적용해보고 싶다. 나의 고립된 삶을 받아준 누군가의 노력으로 내가 사회적인 관계있는 삶으로 변화시켜 주었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다양한 노력 중의 하나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홀로 떨어진 이들은 잘못이 없다. 다양한 성향의 사람으로 수용하지 못한 다른 이의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