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경환 Jul 22. 2023

“고급 속물”


어려서 전공과는 무관하게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책장을 넘겨볼 때, 페미니즘은 참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였다. 그건 무의식까지도 발본해야 할 철저한 실천의 학문이었다. 나같이 마초의 근성에서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어설픈 학인에게 그것은 늘 분열증을 확인시키는 공부였던 것이다. 결국 분열증을 피하려고 그 분야와는 결별했다.


연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특히 문학비평 쪽에서 ‘녹색’이니 ‘생태’니 ‘에코’니를 강조한 시절 얘기다. 너도 나도 떠들어 대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는데, 대개의 경우 내용이 없는 언설들로 넘쳐나고 있어 곧 내던져버리고 말았다. ‘오래된 미래’ 따위의 아포리즘에 기대어 모호한 당위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글에 속아 넘어갈 나이는 지난 것이다.


한 마디로 적색에 대해 무지하거나 그것을 애써 도외시한 채 녹색을 말하는 것은 일종의 분열증이자 너절한 사기에 불과하다. 분열증에 빠진 이는 마치 나를 대하 듯 안쓰럽지만, 사기를 일삼는 자는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속 빈 강정처럼 뻔한 소리를 늘어놓으면서, 젊어서부터 대가인 척하는 자들을 김수영은 “고급 속물”이라고 비난했다.


“일전에 D신문의 「시단평」을 통해서 나는 '한국의 현대시에 대한 나의 답변은 한 마디로 해서 모르겠다!>이다'라는 말을 했다. 이 글을 보고 모 소설가가 '모르겠다고 해서야 쓰겠나. 잘 키워가도록 해야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나는 그를 평소부터 소설가라기보다는 학교교사로 보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들은 후부터는 더욱 그 감이 심해졌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고급 <속물>이 참 많다.”(“飜譯者의 고독” 중에서)

작가의 이전글 마음을 달래며[遣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