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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Dec 08. 2023

어느 대화



이진순 :

선생님이 제시하신 ‘원형 인식모델’은 토대와 상부구조를 기계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음과 양, 화(和)와 동(同), 이상과 현실, 좌와 우를 둥근 원 안의 대칭선상에 놓으신 것이죠. 대비되는 것들은 서로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는 것이라고 하셨고요. 그 말씀엔 다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막상 현실을 보면 이게 쉽지가 않아요. 카운터파트가 격이 너무 떨어져요. 어느 정도 격이 맞아야 상호보완이고 뭐고 하지 않겠습니까? 보수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탐욕과 독선이 도를 넘은 지 오랩니다.


신영복 :

어쩌겠어요? 그렇게 비대칭적으로 자기를 강화하고 군림하는 집단은 다 자기 이유가 있는데. 그런데 그런 중심부 집단은 그게 또 약점이 돼요. 중심부는 변방의 자유로움과 창조성이 없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인류문명의 중심은 부단히 변방에서 변방으로 옮겨왔잖아요. 그런데 이런 역사적 변화는 그렇게 쉽게 진행되는 게 아니에요. 역사의 장기성과 굴곡성을 생각하면, 가시적 성과나 목표 달성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고, 과정 자체를 아름답게, 자부심 있게, 그 자체를 즐거운 것으로 만드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래야 오래 버티니까. 작은 숲(공동체)을 많이 만들어서 서로 위로도 하고, 작은 약속도 하고, 그 ‘인간적인 과정’을 잘 관리하면서 가는 것!”


이진순 :

그 말씀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되네요.(웃음)


신영복 :

저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아마 이 선생보다 더 속상할걸요, 속으로는.(웃음) 근데 엄청난 아픔이나 비극도 꼭 그만한 크기의 기쁨에 의해서만 극복되는 건 아니거든요. 작은 기쁨에 의해서도 충분히 견뎌져요. 사람의 정서라는 게 참 묘해서, 그렇게 살게 돼 있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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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 이분들의 이 대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충분히” 견뎌왔다고 보는데, 그리고 “(세상) 그렇게 살게 돼 있는” 것은 알지만, 이제 좀 힘이 든다. ‘큰 아픔을 견디게 해주는’ 일용할 나날의 “소소한 기쁨”이 없기 때문일까? 아직까지도 유치하게 ‘등가의 보상’을 상상하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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