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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Dec 08. 2023

바뀌어진 지평선


오랜만에 김수영의 <바뀌어진 지평선>(1956)을 꺼내 읽어본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 가운데 하나이다. 길지만, 가끔 독송(獨誦)할 때도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은, 뮤즈는 속도를 늦추고 시인은 속도를 높여야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을 이룬다고 했다.


시방 다시 읽어보면서 '뮤즈'와 '시인'의 자리에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앉혀볼 수 있을까 운산해 본다. 아울러 '다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이라는 전제가 과연 타당한 현실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뮤즈>여

용서하라

생활을 하여 나가기 위하여는

요만한 경박성이 필요하단다

시간의 표면에

물방울을 풍기어 가며

오늘을 울지 않으려고

너를 잊고 살아야 하는 까닭에

로날드 골맨의 신작품을

눈여겨 살펴보며

피우기 싫은 담배를 피워본다


어느 매춘부의 생활같이

다소곳한 분위기 안에서

오늘이 봄인지도 모르고

그래도 날개 돋친 마음을 위하여

너와 같이 걸어간다

흐린 봄철 어느 오후의 무거운 일기(日氣)처럼

그만한 우울이 또한 필요하다

세상을 속지 않고 걸어가기 위하여

나는 담배를 끄고

누구에게든지 신경질을 피우고 싶다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한

생활이 비겁하다고 경멸하지 말아라

뮤즈여

나는 공리적인 인간이 아니다

내가 괴로워하기보다는

남이 괴로워하는 양을 보기 위하여서도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한 것이다

지혜의 왕자처럼

눈 하나 까딱하지 아니하고

도사리고 앉아서

나의 원죄와 회한을 생각하기 전에

너의 생리부터 해부하여 보아야겠다

뮤즈여


클라크 게이블

그리고 너절한 대중잡지

타락한 오늘을 위하여서는

내가 <오늘>보다 더 깊이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웃을까 보아

나는 적당히 넥타이를 고쳐 매고 앉아 있다

뮤즈여

너는 어제까지의 나의 세력

오늘은 나의 지평선이 바뀌어졌다


물은 물이고 불은 불일 것이지만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오늘과 내일의 차이를 정시하기 위하여

하다못해 이와 같이 타락한 신문기자의

탈을 쓰고 살고 있단다


솔직한 고백을 싫어하는

뮤즈여

투기(妬忌)와 경쟁과 살인과 간음과 사기에 대하여서는

너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적당한 음모는 세상의 것이다

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나에게는 약간의 경박성이 필요하다

물 위를 날아가는 돌팔매질ㅡ

아슬아슬하게

세상에 배를 대고 날아가는 정신이여

너무나 가벼워서 내 자신이

스스로 무서워지는 놀라운 육체여

배반이여 모험이여 간악이여

간지러운 육체여

표면에 살아라

뮤즈여

너의 복부를랑 하늘을 바라보게 하고ㅡ


그러면

아름다움은 어제부터 출발하고

너의 육체는

오늘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이다


골맨, 게이블, 레이트, 디보스,

매리지,

하우스펠 에어리어

ㅡ(영국인들은 호스피털 에어리어?)


뮤즈여

시인이 시의 뒤를 따라가기에는 싫증이 났단다

고갱, 녹턴 그리고

물새


모두 다 같이 나가는 지평선의 대열

뮤즈는 조금쯤 걸음을 멈추고

서정시인은 조금만 더 속보로 가라

그러면 대열은 일자가 된다


사과와 수첩과 담배와 같이

인간들이 걸어간다

뮤즈여

앞장을 서지 마라

그리고 너의 노래의 음계를 조금만

낮추어라

오늘의 우울을 위하여

오늘의 경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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