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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Dec 17. 2023

눈이 내렸기에


김시습의 「설죽(雪竹)」이라는 시를 읽었다.


설죽참차압만간(雪竹參差壓萬竿)

야래화우패낭간(夜來和雨敗琅玕)

명조제후응환기(明朝霽後應還起)

요절상부가인간(拗折相夫可忍看)


한시 연구에서 일가를 이룬 A선생은 이렇게 풀었다.


눈 맞은 대나무 들쭉날쭉 눌려 있는 저 줄기들

간밤 비에 섞여 옥 같은 가지 망가졌네

내일 아침 갠 뒤엔 다시 일어나겠지만

부러진 채 서로 기댄 모습 차마 볼 수 있으랴


역시 한시에 능통한 B선생은 이렇게 풀었다.


대숲에 눈이 내려 만 줄기 누르더니

밤에는 비 섞여 쳐 푸른 가지 부러지네

내일 아침 비 갠 뒷면 다시 일어나겠지만

꺾인 채 얽힌 것을 차마 어찌 보리오


내가 보기에, 기구(起句)에서 A는 줄기를, B는 눈을 주체로 푼 것 같다. 그런데 시 전체의 흐름이 ‘줄기’에 초점이 맞춰 있으니 A처럼 풀이하는 게 맞겠다. 그리고 이 구에서는 “참차(參差)”라는 말이 화자의 불안한 시상과 관련하여 중요해 보이니, A처럼 그 뜻을 드러내 보이는 게 낫겠다. 참고로 남송의 홍매(洪邁, 1123∼1202)는 꿈속에서 돌아가는 길이 어지럽다고 하면서 “몽중귀로다참차(夢尋歸路多參差)”라고 했다.


그리고 전구(轉句)와 결구(結句)에 등장하는 가지들은 서로 다른 것인 것 같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가지들은 눈비를 맞더라도 어떻게든 견뎌낸 후 다시 일어나겠지만, 어떤 가지들은 꺾이고 부러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각설. 결구(結句)의 “상부(相夫)” 문제다. A에서는 “서로 기댄 모습”이라 했고, B는 “얽힌 것”이라 풀었다. 둘 다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참에 견강부회를 한 번 해보기로 한다. 이 시를 보고 당장 떠오른 것은 하덕규의 <가시나무새>에 나오는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였다. 이 가사에 이어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라고 하여 물론 “가시”가 논란의 핵심인 것은 알겠다. 그런데 김시습의 시에서는 그것이 ‘부러지고 꺾인 가지들’로 대체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결구는 “부러지고 꺾인 채 서로 부대끼는 모습, 차마 볼 수 없구나” 정도로 풀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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