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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Dec 17. 2023

극한(極寒)

北岳高戊削(북악고술삭)

南山松黑色(남산송흑색)

鷹過林木肅(응과임목숙)

鶴鳴昊天碧(학명호천벽)      


연암 박지원의 「극한(極寒)」이라는 시다. 시를 감상하기 전에, 먼저 운()을 맞추기 위해 선택한, 그리고 시의 분위기와 상황을 제시하는 데 동원한 글자들, 곧 ‘삭(削)’, ‘ 흑(黑)’, ‘ 숙(肅)’, ‘벽(碧)’, 네 글자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삭(削)’은 ‘칼’을 의미하는 ‘도(刀)’와 ‘작아지다’ 혹은 ‘없어지다’의 뜻을 지닌 ‘소(肖)’가 결합해 이루어진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삭(削)’은 단순히 ‘깎다’보다는 ‘(칼 같은 날붙이를 써서 끝을) 뾰족하게 하다’고 풀이하는 것이 적절하다. 그래야 앞의 ‘戌[창]’하고도 잘 어울린다.


‘흑(黑)’은 글자 아래에 ‘불’이 있듯이, ‘불을 피워 창끝을 검게 그을린다’는 뜻이다. 역시 앞의 ‘戌[창]’하고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숙(肅)’은 보통 ‘엄숙하다’는 뜻으로 쓰이지만, 잘 살펴보면 깊은 의미가 서려 있다. ‘수건’을 의미하는 ‘건(巾)’과 ‘연못[淵]’에서 삼수변을 뺀 나머지 글자가 합쳐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손에 수건을 들고 깊은 연못 위에서 일을 하듯이, 매우 두려워하여 삼가고 조심하라’는 뜻이 거기에 스며들어 있다.


‘벽(碧)’은 대개 ‘푸르다’라는 의미로 이해되지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옥돌의 맑고 푸른 기가 있는 흰색’의 뜻이다. 이 글자가 ‘옥玉’과 ‘돌[石]’뿐 아니라 ‘백(白)’이 합쳐져 이루어진 까닭이다. 그러니 '벽(碧)’은 요즘말로 하면 ‘희푸르다’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풀이하고 나니, 이 시는 이렇게 옮길 수 있을 것 같다.


   북악은 창날처럼 뾰쪽하고

   남산 소나무는 거메졌다

   매 날자 숲은 겁먹고

   학 울자 하늘은 희푸러졌다


그런데 대충 해석은 된 것 같은데, 도대체 이 시가 드러내고자 하는 상황은 무엇인가? 연암은 무엇을 문제 삼고자 이 시를 지은 것일까? 북악산이 뾰족하다는 것은 대강 알겠는데, 남산의 소나무가 거메졌다니? 더구나 매가 날자 숲이 겁먹었고, 학 울음에 하늘이 희푸르러졌다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이쯤에서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다. 제목은 ‘매서운 추위’, 곧, ‘극한(極寒)’이다. 이렇게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 같지 않은가? 코끝이 쨍해서 정신이 번쩍 날 만큼의 추위를 겪어 본 이들은 잘 알 것이다. 매 보던 산이건만 지독히도 서슬 시린 어느 날 문득 바라 본 산은 머리칼이 서듯 바짝 긴장해 솟아 있음을, 그리고 먼 산의 소나무 역시 푸르름을 잃고 엉거주춤 거무죽죽한 물체로 물러서 있음을.


나는 이 시에서, 낙목(落木)소리 간간히 울리는 적막 가운데 매 한 마리 쌩 날아오르자 온 숲이 겁먹고 움추려 들었다고 하고, 눈 내린 후 어디에선가 학 울음소리 들려오자 그야말로 공활하게 펼쳐진 하늘이 돌연 희푸르게 질렸다는 표현들이야말로 득의(得意)의 구절이라 여겨 마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춥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이렇게 극한의 추위를 단번에 장악해서 풀어내는 저 능력은 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그 저 경이롭기만 하다. 역시 연암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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