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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Dec 29. 2023

소위 "빈자의 미학"에 대하여


명망 있는 건축가 승효상의 건축 에세이집 제목이다. “빈자”라는 말이 걸린다. 영어로 “Beauty of Poverty”라고 한 걸 보면, “빈자”는 “貧者”, 곧 가난한 사람을 뜻하는 말일 테다. 물론 “者”가 반드시 사람을 뜻하는 건 아니니, “貧者”는 “가난(함)”으로 읽을 수 있다.


각설. 그런데 글을 읽어보니, 좀 다른 맥락인 것 같다. “빈자의 미학. 여기서는 가짐보다는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 그렇다면 이런 건 “가난”이라기보다는 “여백”이랄까, “비움”이랄까 하는 개념에 가깝다.


저자는 추사의 글씨를 말하면서 “이 정신은 공허에 대한 침묵이며, 절제”라고 했다. 그리고 막스 피카르트의 “살아 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 침묵을 찾는다”라는 멋진 말을 인용하였다. 이렇게 보면, 그가 말하는 저 “가난”은 공허와 침묵과 절제 같은 것을 지시함을 알겠다.


그런데 하필 그것을 “가난”이라 표현했을까? 나는 이런 것을 지식인의 포우즈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가난을 경험해 보지 못했다. 경험했더라도 그것은 지나간 추억의 일종일 뿐인지 모른다. 그래서 가난을 저렇게 표현해 낼 수 있다.


우리 학창 시절 배웠던 안빈낙도(安貧樂道), 곧 가난 속에서 도를 즐긴다는 따위의 포우즈와 다르지 않다. 실제로 저자는 “조선 오백 년을 버티게 한 우리의 선비정신은 불행히도 지금 우리에게 전해져 있지 않다”고 한탄한 바 있다. 그의 말대로 조선을 “버티게” 한 정신이 있다면, 그것은 찬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연전에 나는 이런 말을 쓴 적이 있다. “중학교 시절 국어책에서 만난 김소운의 〈가난한 날의 행복〉.... ‘왕후의 밥, 걸인의 찬’이니, ‘(가난했지만) 가슴속에는 형언 못할 행복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느니 하는 말 앞에서 자기 분수를 모르고 불평불만만 하는, 곧 안분지족(安分知足)하지 못하는 철부지 나를 몹시 부끄러워 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박정희 정권은 교과서를 통해 교실을 성공적으로 장악해 가고 있었다. 거기에 고전에서 맥락을 무시하고 추출한 ‘고사성어’가 크게 한 몫을 하였다. 그까짓 구절들이나 외게 해서 대체 어쩌려는 것인가. 첨부하자면, 이런 안빈낙도를 강조하다 보면 <흥부전>에서의 ‘가난이야 가난이야 웬수년의 가냔이야’라는 절규가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래서 가난은 더욱 더 부끄러운 것이 되고, 거기서 헤어나올 수 없는 책임은 전적으로 가난한 개인이 지게 된다. 가난이 게으른 탓이라는 지적보다 추악한 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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