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경환 Dec 31. 2023

묵은세배와 도소주


《동국세시기》를 지은 홍석모(1781~1857)가 서울의 세시풍속을 126수의 7언절구로 묘사한 《도하세시기속시(都下歲時紀俗詩)》에 ‘배구세(拜舊歲)’라는 제목의 시가 전한다.


섣달그믐 묵은세배 / 위로 왕궁에서 아래론 여염(閭閻)까지 / 길들이 막혀도 끊임없이 오고가니 / 뉘 집에서 장기 두며 도소주(屠蘇酒)에 취할까


배구세는 묵은세배라는 말이다. 아시다시피 해가 바뀌는 날에 존장자에게 절을 해 예를 표하는 것을 세배라 하는데, 섣달그믐날 밤에 옛것을 보내는 뜻으로 하는 것을 따로 묵은세배라 하였다. 대개 송구영신(送舊迎新) 즈음에 과거에 대한 감사와 장래에 대한 희망의 뜻을 표하는 하나의 의례(儀禮)였는데, 지금은 사라진 풍습이 되었다.


위 시에 나오는 ‘도소주’는 길경(桔梗), 산초, 방풍(防風), 백출(白朮), 밀감피(蜜柑皮), 육계피(肉桂皮) 따위의 약초를 다려 빚은 술로, 설날에 마시면 사기(邪氣)를 물리친다고 여겼다. 후한(後漢)의 신의(神醫) 화타(華陀) 혹은 당 나라의 손사막(孫思邈)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이 도소주는 초백주와 함께 섣달그믐날에 담근다. 조재삼(趙在三)은 《송남잡지(松南雜識)》에서 “(도소주의) 도는 귀신의 기를 잘라 버리고, 소는 사람의 혼을 각성시킨다는 뜻”이라 했다.


도소주는 보통 데우지 않고 마시는데, 봄을 맞이하는 뜻이라고 한다. “나보다 먼저 도소주를 마시는 이 많으니 / 늙은 줄 알아 장대한 포부를 저버린다”는 재미난 시구에서 보듯이, 세주는 젊은이부터 마신다.


이 도소주와 관련한 근래의 기록으로는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의 <탑원도소회지도(塔園屠蘇會之圖)>(1912, 간송미술관. 종이에 옅은 채색. 23.4 x 35.4cm)가 있다. 제목은 ‘탑원에서 열린 도소주 마시는 모임’이라는 뜻이다. 탑원은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의 집이다. 저 뒤에 보이는 탑은 백탑, 곧 지금의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십층석탑이다. 지금은 유리에 갇혀 있다. 이 동네에 연암 박지원이 살았다.(그래서 ‘연암그룹’을 ‘백탑파’라고도 한다.)

 

1912년 새해를 맞아 오세창의 집에서 뜻있는 사람 여덟 명이 모여 도소주를 마신다. 거기에는 손병희, 최린 등 후에 민족대표 33인으로 불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을 둘러싼 안개는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말해 주는지 모른다. 그 축축한 안개에 실려 일제라는 염병이 몰려왔다. 그들은 그것을 물리치고자 다짐하며 도소주를 마셨다.


사기(邪氣)로 가득찬 요즘이야말로 도소주를 마셔야 할 터인데, 모든 게 여의치 않다.

작가의 이전글 세밑 단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