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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an 05. 2024

옛글을 읽는 이유


“자기 하나의 사적인 일을 경영하노라면 갖가지 외물과 접촉하며 수작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육체적으로 지쳐 쓰러지고 정신적으로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면서 은원(恩怨)의 관계를 마구 맺게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고화(膏火)가 태우는 것과 같고, 빙탄(氷炭)이 교차하는 것과 같고, 교칠(膠漆)이 달라붙는 것과 같을 것이니, 예(穢)에서 정(淨)으로 가는 그 이치는 어떻게 되었다고 하겠는가. 그러다가 형세가 궁해지고 사태가 극도에 이르게 되면, 육신은 시들어서 축 늘어지고 정신은 아무 것도 없이 공허해지고 관계는 얼음이 녹고 구름이 흩어지듯 할 것이다. 이런 지경에 이르러서는 자기 몸 하나도 보전할 수 없을 것인데, 더군다나 외물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고려 말 이곡(李穀, 1298∼1351)의 말이다. 당시 승려였던 삼장당(三藏公) 순암(順菴)이 집을 짓고 ‘허정당(虛淨堂)’이라는 편액을 내건 것에 대한 이곡의 설명이다. 그런데 어찌 이리도 잘 표현했을까? 지금 나의 삶, 그리고 현실과 너무나도 잘 들어맞는다. 옛글을 줄곧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번역자인 이상현 선생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아 놓았다.

- “고화가 태우는 것” : 육체적으로 해를 당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에 “산의 나무는 유용하기 때문에 벌목을 자초하고, 유지(油脂)는 불을 밝힐 수 있어서 자기 몸을 태우게 만든다.[山木自寇也 膏火自煎也]”라는 말이 나온다.


-“빙탄이 교차하는 것” : 정신적으로 갈등과 번뇌에 시달리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장자》 인간세에 “기쁨과 두려움 등의 감정이 가슴속에서 싸우는데, 이는 원래 인간의 오장 속에 얼음과 탄불이 한데 뒤엉겨 있기 때문이다.[喜懼戰于胸中 固已結氷炭于五臟矣]”라는 말이 나온다.


- “교칠이 달라붙는 것” : 부레풀과 옻나무의 칠처럼 뗄 수 없는 인간관계를 맺게 되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보통 교분이 두터운 우정을 가리킬 때 긍정적으로 쓰는 표현이지만, 여기서는 사적인 이익을 위해서 서로 유착하는 불미스러운 관계라는 뜻으로 쓰였다. 후한(後漢)의 진중(陳重)과 뇌의(雷義)가 돈독한 우정을 발휘하자, 사람들이 “교칠이 굳다고 하지만, 진중과 뇌의의 우정만은 못하다.[膠漆自謂堅 不如雷與陳]”라고 칭찬했던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81 獨行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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