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경환 Jan 15. 2024

반야용선

  

연전 친우 몇몇하고 해남 일대를 답사한 적이 있다. 저녁마다 술로 곤드레만드레 보내느라, 멋진 경관들은 그저 주마간산 격으로 슬쩍 지나쳐 버리기 일쑤였지만, 해남 달마산의 미황사는 꽤 볼만한 풍광이었다. 특히 미황사의 낙조는 고창 선운산 낙조대에서 바라보았던 그것만큼 황홀하였다.    


 미황사 뒷산인 달마산을 뛰어오르는 만용을 부리다가 정상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중턱에서 그만 내려오고 말았지만, 그 대신 미황사의 구석구석을 두루 돌아볼 기회를 가진 것은 의외의 소득이었다. 우리나라 육지의 최남단에 있는, 신라 때 의조(義照)가 창건한 미황사는 다른 절들과 마찬가지로 절을 세우게 된 이야기, 곧 사찰연기설화(寺刹緣起說話)를 지니고 있다. 미황사 사적비(事蹟碑)에 따르면, 대강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749년 8월 한 척의 석선(石船)이 사자포(獅子浦; 속칭 사재 끝, 땅끝) 앞바다에 나타났는데, 의조가 제자 100여 명과 함께 목욕재계하고 해변으로 나갔더니 배가 육지에 닿았다. 배에 오르니 금인(金人)이 노를 잡고 있고, 놓여 있는 금함(金函) 속에는 『화엄경』, 『법화경』, 비로자나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40성중(聖衆), 53선지식(善知識), 16나한의 탱화 등이 들어있었다. 곧 하선시켜 임시로 봉안하였는데, 그날 밤 꿈에 금인이 나타나 자신은 인도의 국왕이라며, “금강산이 일만 불(一萬佛)을 모실 만하다 하여 배에 싣고 갔더니, 이미 많은 사찰들이 들어서서 봉안할 곳을 찾지 못하여 되돌아가던 길에 여기가 인연토(因緣土)인 줄 알고 멈추었다. 경전과 불상을 소에 싣고 가다가 소가 멈추는 곳에 절을 짓고 모시면 국운과 불교가 함께 흥왕하리라.” 하고는 사라졌다. 다음날 소에 경전과 불상을 싣고 가다가 소가 크게 울고 누웠다 일어난 곳에 통교사(通敎寺)를 창건하고, 마지막으로 멈춘 곳에 미황사를 지었다. ‘미황사’라고 한 것은 소의 울음소리가 지극히 아름다웠다 하여 미(美) 자를 취하고, 금인의 빛깔을 상징한 황(黃) 자를 택한 것이라 한다. 이름 그대로 대단히 아름다운 사찰이다.


화설. 미황사의 본전(本殿)인 대웅보전(大雄寶殿)의 주춧돌을 보면 게와 거북, 그리고 물고기 따위가 부조되어 있다.이것을 두고 같이 간 이들끼리 잠깐 이바구를 떨었다. 중론은 여기가 바닷가이므로 그런 바다생물들이 조각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실제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미황사 앞에 바다가 있어서 친숙한 바다생물들이 새겨진 것이라는 의견이 그야말로 즐비하다. 다른 견해는 목조건물인 미황사를 화마(火魔)로부터 지키려는 목공들의 깊은 뜻이 거기에 들어 있다는 것인데, 설득력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좀 더 철학적인 이야기인데, 불교가 남방 해로를 통해 유입되었으니, 주춧돌에 바다생물이 부조되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나는 그것들과는 좀 다른 의견을 내었는데, 당시에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대부분 이과 계통의 교수들이어서인지, 문학을 전공하는 내 말은 대개 픽션이 가미된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한다. 내 말의 요체는 이렇다. 미황사 대웅전의 주춧돌에 새겨진 게와 거북, 그리고 물고기 따위는, 그 대웅보전이 곧 반야용선(般若龍船)임을 알려주는 징표라는 것이다. 반야용선이란, 간단히 말하면 이 괴로운 세상에서 정토(淨土)인 저 세상, 곧 피안(彼岸)으로 중생을 데려다 주는 배란 뜻이다.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극락전(極樂殿) 벽화인 반야용선도[정확히는 ‘반야용선접인도(般若龍船接引圖)’]이다. ‘반야용선’에서 ‘반야(般若)’는 대개 교훈, 판단, 지능, 요해(了解) 등의 뜻을 지니면서 진여(眞如)에 도달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범어(梵語)에서는 ‘최상’, ‘완전’의 의미가 있지만, 중국에서는 ‘저편’, ‘건너다’의 뜻으로 이해하였다. ‘용선(龍船)’은 글자 그대로 용이 모는 배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반야용선은 생사의 고해(苦海)를 건너 정토(淨土)로 이끄는 배가 된다. 실제로 절에서는 죽은 사람의 넋이 정토나 천상에 나도록 기원하는 불교 의식인 천도재(薦度齋)를 하고, 마지막으로 고인을 태워 보낼 때 이 용선을 쓰기도 한다. 이 반야용선의 뱃머리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타고 있는데,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부처의 세계까지 길을 인도해 준다는 의미에서 ‘길을 인도하는 왕’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뒤쪽에는 지장보살이 그려져 있다. 지장보살은 석가모니 입멸 후 미륵보살이 성불할 때까지, 곧 부처가 없는 시대에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로, 그는 모든 중생이 구원을 받을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큰 서원을 세웠다. 특히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는 데 중점을 두기 때문에 사찰의 명부전(冥府殿)에 본존(本尊)으로 모신다.   


 반양용선을 생각하면 곧바로 만해 한용운의 시 「나룻배와 행인」이 떠오른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이 시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제출된 바 있지만, 불교와 관련하여 이해하는 게 가장 무난해 보인다. ‘나’와 ‘당신’의 관계를 나룻배와 행인으로 설정하여 참된 사랑의 본질이 희생과 믿음, 그리고 자비와 인내에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강을 건너게 해주는 나룻배는 중생 구제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이 시는 ‘반야용선’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각설. 대개 본전의 옆면 대들보에는 용머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미황사의 대웅보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바로 그 대웅보전 자체가 반야용선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러므로 본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피안(彼岸) 행 반야용선에 승선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미황사 대웅보전의 주춧돌에 게와 거북, 그리고 물고기를 새겨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런 사례가 비단 미황사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예컨대 내륙 깊숙이 자리 잡은 청도 대적사(大寂寺)의 극락전 기단(基壇)에도 거북과 게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요컨대 미황사 대웅보전의 주춧돌에 부조된 게와 거북, 그리고 물고기는 그것이 바다와 인접해 있기 때문이라거나 불교가 남방 해로를 통해 유입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견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여기서도 잘 통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추측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