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 동안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으나, 말기에 친일파로 변절, 친일이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해방정국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입하여 마르크스주의 학술운동 등에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다시 전향하여 국민보도연맹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고(남로당노선비판),한국 전쟁 때 월북했다. 행로가...
당시 조선을 "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규정한 농업학자이기도 한 그를 <경성트로이카>에서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박진홍은 인정식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인정식은 조직문제나 활동에는 별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농업이론을 설명하겠다며 박진홍에게 둘만의 회합을 갖자고 하면서도 막상 만나면 농민운동에 대해서보다 박진홍 개인에 더 관심을 보였다. 박진홍에게 여류작가가 되어 조선의 무산계급을 각성시키는 게 어떠냐고 권유하기도 하고 (...) 박진홍은 그가 사회주의운동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박진홍은 그를 운동가라기보다는 자유주의적 지식인이라고 규정하고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정기적인 만남을 지속하기로 했다."
1937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이재유의 구속으로 거의 와해되자, 그의 처 박진홍이 조직을 새롭게 꾸려나갈 즈음 이재유와 일본에서 함께 활동한 적이 있던 인정식을 포섭할 당시의 이야기다.
참고로 시인 신동엽은 인정식의 사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