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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an 17. 2024

딜레마의 오류


배타적으로 '완전히' 대립된 선택지를 제시하고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잘못된 이분법’이다. ‘이항대립의 오류’니 ‘흑백논리’니가 다 유사한 잘못일 것이다.


1970년대 초 기독교가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 있을 때, 보수교단에서 들고 나온 논리가 “사회구원이 먼저냐, 개인구원이 먼저냐”였다. 길게 따질 것 없다. “네 한 몸 건사하지도 못하면서 무슨 사회구원이라는 말이냐”는 것이다. 이따위 엉터리 질문을 제기하는 자들은 한 마디로 말해서 ‘바보 만들기’의 첨병들이다. 엉터리 이항대립을 설정해서 “제3의 길”을 원천적으로 봉쇄해 버리는 것이다. ‘구원’을 위한 노력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신소설의 작가로 잘 알려진, 일제 때 왜정 정보원 노릇을 한 조중환이 총독부의 명을 받아 일본에서 들여와 공전의 대히트를 친, 우리에게는 <이수일과 심순애>로 잘 알려진 <장한몽(長恨夢)>은 “돈을 쫒자니 사랑이 울고, 사랑을 쫒자니 돈이 운다”라는 엉터리 이항대립을 크게 유행시켰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립의 의지나 열망’ 같은 흐름을 차단하고 억압하는 데 성공적으로 기여했다.


이런 설정은 마치 “건강에는 정신건강과 육체건강이 있는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고 묻는 것처럼 우습기 짝이 없다. 두 건강 모두 중요하다. 두 건강 모두에 문제가 없어야 진정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어느 글을 보니, ‘학문의 자유냐 피해자의 인권이냐’라는 일종의 딜레마를 설정하고, 자신은 후자의 편에 서겠다고 한다. 많은 지지를 얻어, 공분이 조성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것도 일종의 잘못된 이항대립의 하나라고 본다. 그 둘은 그 중 어느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김수영 식으로 말하면 ‘둘은 동시에 나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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