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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an 18. 2024

조경문(弔鏡文)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고주망태 모씨(某氏)는 두어 자 글로써 안경에게 고(告)하노니, 눈 나쁜 사람에게 종요로운 것이 안경이로대, 세상 사람이 귀히 아니 여기는 것은 도처(到處)에 흔한 바이로다. 이 안경은 한낱 작은 물건이나, 이렇듯이 슬퍼함은 나의 정회(情懷)가 남과 다름이라.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아깝고 불쌍하다. 너를 얻어 손 가운데 지닌 지 우금(于今) 칠 년 여라. 어이 인정(人情)이 그렇지 아니하리요. 슬프다. 눈물을 짐깐 거두고 심신(心身)을 겨우 진정(鎭定)하여, 너의 행장(行狀)과 나의 회포(懷抱)를 총총히 적어 영결(永訣)하노라.


아깝다 안경이여, 어여쁘다 안경이여, 너는 미묘(微妙)한 품질(品質)과 특별(特別)한 재치(才致)를 가졌으니, 물중(物中)의 명물(名物)이요, 각중(角中)의 백미로다. 총명하고 발랄하기는 백대(百代)의 협객(俠客)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萬古)의 충절(忠節)이라. 미끈한 다리는 천하의 일색이요, 둥그런 얼굴은 원만한 부처인지라. 어두운 방에서나 흔들리는 찻간 속에서 글을 읽을 제,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徹)하도록 한 그 민첩하고 신기(神奇)함은 귀신(鬼神)이 돕는 듯하니, 어찌 인력(人力)이 미칠 바리요.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자식(子息)이 귀(貴)하나 손에서 놓일 때도 있고, 비복(婢僕)이 순(順)하나 명(命)을 거스릴 때 있나니, 너의 미묘(微妙)한 재질(才質)이 나의 전후(前後)에 수응(酬應)함을 생각하면, 자식에게 지나고 비복(婢僕)에게 지나는지라. 자그마한 곽으로 집을 하고, 얄팍한 홑이불로 사시(四時)를 보냈으니, 안빈낙도(安貧樂道) 아닐런가. 책 볼 때 읽어주고, 잠잘 적엔 함께 자니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가 울고 가지 않겠는가. 이생에 백년 동거(百年同居)하렸더니,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안경이여.


어제 저녁 친구들과 거나하게 마신 후에, 희미한 등불 아래 잠시 쉬다가 무심중간(無心中間)에 잠깐 잃어버리니, 깜짝 놀라와라. 아야 아야 안경이여, 어디를 헤매느냐. 정신(精神)이 아득하고 혼백(魂魄)이 산란(散亂)하여, 마음을 빻아 내는 듯, 두골(頭骨)을 깨쳐 내는 듯, 이윽토록 기색혼절(氣塞昏絶)하였다가 겨우 정신을 차려, 찾아보고 훑어본들 속절없고 하릴없다. 어느 눈밝은 이 있어 내 짝을 찾아줄손가. 한 팔을 베어 낸 듯, 한 다리를 베어 낸 듯, 아깝다 안경이여, 콧 등잔을 만져보니 얹혔던 자리 없네. 오호 통재(嗚呼痛哉)라, 내 삼가지 못한 탓이로다.

무죄(無罪)한 너를 마치니, 백인(伯仁)이 유아이사(由我而死)라, 누를 한(恨)하며 누를 원(怨)하리요. 능란(能爛)한 성품(性品)과 공교(工巧)한 재질을 나의 힘으로 어찌 다시 바라리요. 절묘(絶妙)한 의형(儀形)은 눈 속에 삼삼하고, 특별한 품재(稟才)는 심회(心懷)가 삭막(索莫)하다. 네 비록 물건(物件)이나 무심(無心)ㅎ지 아니하면, 후세(後世)에 다시 만나 평생 동거지정(平生同居之情)을 다시 이어, 백 녁 고락(百年苦樂)과 일시 생사(一時生死)를 한 가지로 하기를 바라노라. 오호 애재(嗚呼哀哉)라, 안경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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