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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Jan 21. 2024

남의 눈

   

스승님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않고, 남을 알지 못함을 근심한다.” 子曰:  不患人之不己知, 患不知人也.       \


이와 유사한 말을 공자는 <논어>에서 여러 번 했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것 역시 군자가 아닌가”,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남에게 알려질 수 있는 바탕을 추구하라",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에게 능력이 없음을 걱정하라”, “군자는 능력이 없는 것을 근심하고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않는다.” 등등     


지식인은 대개 명성, 특히 허명(虛名)을 좋아한다. 명성을 단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 공자가 정말로 이 명성에 개의치 않았을까? “군자가 仁에서 벗어난다면 어떻게 이름을 높일 것인가?”, “군자는 죽고 나서 이름이 기려지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고 했으니, 공자는 오히려 명성을 대단히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명성에 개의치 않았다면 “나를 알아주는 이 없구나”, “나를 알아주는 자는 하늘일 것이다”라고 탄식했을까? 공자도 속으로는 매우 고독한 인간이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다른 해설서들에서 대개 “이 말은 이미 제 길을 가는 사람에게는 해당이 없고, 남의 눈길과 평가에 급급한 우리들 범인에게 내리는 채찍”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그것이야말로 ‘관념의 공자’를 구성한 결과일 것이다. 섭섭한 것을 안 그런 척하는 것이야말로 위선이다. 관건은 그 섭섭함을 실력, 내공으로 보상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도 한번 생각해 보자. 사실 우리가 누구를 안다는 것도 겉모양에 한정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외양을 대충 알고 그를 알았다고 하는 것이야말로 편견이다. 그렇게 스스로 편견을 가져 놓고서는 나중에 '속았다'고 욕을 한다. 이것이 ‘나는 사람을 볼 줄 안다’는 이의 병폐다. 김국환이 핏대 올려 노래한 “내가 너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가 솔직한 토로일 것이다. 이참에 조조의 참모였던 유소의 『인물지』 한 구절을 읽어보자.      


“처음에 대충 외형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 버리는 오류가 있게 되며, 또 행동거지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는 오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관찰할 때 그 드러난 행실만 좇아서 명성을 믿었다가는 그의 속내와 진상을 놓치게 된다. 그래서 얄팍한 재주를 드러내 보이면 남다르다고 여기고, 속이 깊고 과묵하면 텅 비어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기며, 경전에 대해 몇 마디만 하면 의리에 밝다 하는데, 이는 마치 이런저런 동물들의 소리를 듣고서 그 동물의 이름이 소리에 따라 지어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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