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수영의 시를 좋아하지만, 그 좋아하는 바를 요령껏 그리고 무엇보다도 일관되게 해설할 수 없다. 아니 그렇게 설명하고 싶지 않다.
이시영의 《시 읽기의 즐거움》을 틈틈이 본다. 거기에 역시 김수영이 빠지지 않는다. “김수영의 「꽃잎 1」에 대하여”다. 이시영의 이 소론은 “임홍배의 해석에 대한 짧은 반론”이다. 임홍배가 이 시에서 “모든 개체들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소명을 다함으로써만 매순간 다시 시작될 역사의 새로운 기점을 환기하는 비장한 울림”(「시와 혁명」)을 읽어낸 것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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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의 주장은 이렇다. 이 시는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꽃잎”이나 “혁명”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무거운 것으로부터, 거대의미로부터 벗어나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는 바람의 무의미, 무의도성에 가닿기 위한 시인의 어떤 지난한 몸짓 혹은 염원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시에 관한 한 임홍배의 저 ‘무거운’ 해석보다는 이시영의 보다 ‘가벼운’ 읽기가 마음에 다가온다. 그러나 이 시에서 “무의미”나 “무의도성”을 찾아 읽는 것 역시, 이시영이 임홍배를 비판한 바로 그 “과잉해석”이라고 생각한다.
좀 뜬금없어 보이지만, 나는 이 시의 '눈'이 “조금”이라는 말에 있다고 본다. 이 “조금”은 이시영이 말하듯 그런 “심각하지 않게”나 “그냥 심드렁하게” 정도의 뜻이 아니다. “조금”은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인 것이다. 그런데 그 “조금”의 공간은 바람이 “자기가 가 닿은 언덕을 /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 닿기 /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는 알 수 없는, 그야말로 막대한 공간과 대비된다.
이러한 대비는 그의 <冬麥>에서 이렇게 변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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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에는 겨울보리에 싹이 트고
강아지는 낑낑거리고
골짜기들은 평화롭지 않으냐ㅡ
평화의 의지를 말하고 있지 않으냐
울고 간 새와
울러 올 새의
적막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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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싹이 트”는 움직임과,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야말로 “조금”이다. 그런데 그것은 “울고 갈 새와 / 울고 올 새의 / 적막 사이”라는 막대한 공간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대비에서 하이데거가 말한 “大地의 은폐”와 반대되는 “世界의 개진” 같은 것이 가능해진다고 본다. 그래야 저 “평화의 의지” 운운이 절절해진다.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렇다. 김수영의 유일한 연예시 「美人」에서 “미인과 앉은 방에선 무심코 / 따놓는 방문이나 창문이 / 담배연기만 내보내려는 것은 / 아니렷다”)
이건 글자 그대로 엉터리 해석이다. 그런데 나는 이시영이나 임홍배와는 좀, 아니 매우 다르게 읽고 싶다. 말하자면 뭔가를 해결해 내려고 김수영을 읽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글을 써서 발표할 생각 같은 건 없다. 그저 잘 놀고 싶은 것이다.
「꽃잎 1」을 읽어본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바람의 고개는 자기가 일어서는 줄
모르고 자기가 가닿는 언덕을
모르고 거룩한 산에 가닿기
전에는 즐거움을 모르고 조금
안 즐거움이 꽃으로 되어도
그저 조금 꺼졌다 깨어나고
언뜻 보기엔 임종의 생명 같고
바위를 뭉개고 떨어져 내릴
한 잎의 꽃잎 같고
革命같고
먼저 떨어져 내린 큰 바위 같고
나중에 떨어진 작은 꽃잎 같고
나중에 떨어져 내린 작은 꽃잎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