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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현(之玄)

by 진경환


오늘 동네(?)를 다니다 보니, 아 골목이라는 게 없구나, 실감했다. 구불구불 혹은 곧지만 좁다랗게 뻗어 있던, 그래서 어느 집 담벼락엔 꽃이 걸리고, 운동화를 말리고, 똥 푸는 날엔 온 동네에 냄새가 진동을 하고, 겨울날 터진 손등을 호호 불며 ‘알령’을 하고, 꺾이는 희미한 가로등 아래선 뽀뽀를 하고, 어렵게 어렵게 친구의 집을 찾고, 여름엔 모두를 나와 수런거리던 골목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이 골목을 돌고 저 골목을 꺾어 한참을 지나야 도착하던 집. 그런 일은 이제 없다. 풍수에서는 그런 길, 말하자면 신작로 ‘행길’에서 집으로 가려면 산모퉁이를 돌고, 내를 건너고 논밭을 가로질러 다시 어느 집 담벼락을 돌아서야 도달하는 길을 “지현(之玄)”이라 한다. 무슨 뜻이 있는 게 아니고, 글자 모양대로 구불불하다는 것이다. 사람 사는 동네는 모름지기 그래야 할 것이다.


이제는 "지현", 한때 내 자호로 쓰기도 했던 그런 길은 없다. 적어도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아파트와 아파트 사이는 골목이 아니라, 아스팔트 주차장이다. 그런 살풍경에 살려고 비싼 돈을 얻어 지불해야 하다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마종기의 <정화된 골목>을 읽어 본다.

...

물론이지, 기억나고말고.

이른 아침, 이른 봄, 이른 나이에

분홍 목련만으로 눈이 부시던 날.

어느 해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주위는 지워지고 꽃만 가득하던 골목,

암, 다 기억나고말고.

그 정화된 몸.


나는 몇 해 버려진 꽃씨였던지,

먼지의 돌담 벽에 기대선 풀씨였던지.

목련이 깊게 미소하며 수런대는 시간에

바람 타고 멀리 떠나고 싶었던 황홀이었던지.

반가워서, 아쉬워서, 아니면 추워서였나,

아직도 설명할 수 없는 게 너무도 많아.


나이는 냉정한 아파트 단지가 다 먹고

고층 빌딩의 각진 그림자만 차갑게 남았어.

물론이야, 기억이 안날 수 없지.

그 젊은 날은 정화된 꽃 속에서 숨죽여 살고

고통을 이겨낸 것들, 오늘은

우리를 무심히 지나가네.

....

정말로 내 “나이는 냉정한 아파트 단지가 다 먹”어 치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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