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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Mar 29. 2024

포은(圃隱) 이제(二題)


1. 풍덕(豊德)


1931년 개성부가 독립되자 개성군의 나머지 지역과 풍덕군이 합쳐져 개풍군이 되었다. 박완서의 고향이다.


정몽주는 '1392년'에 살해를 당한 후 개성 풍덕군에 묻혔다. 그후 1406년 고향 영천으로 이장했다. 사망 후 14년이 지난 후이다. 고향으로의 이장은 관례였는지 아니면 거기에 무슨 정치적 이유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각설. 문제는 용인과는 아무런 인연도 없는 이곳에 포은의 유택이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장행렬이 내가 사는 수지 풍덕천에 이르자 명정이 바람에 날아갔고, 그것이 떨어진 곳이 지금의 묘자리다.


참고로 대표적인 교통체증 지역인 풍덕천 사거리에서 포은 묘까지는 대략 12km다.


'풍덕천'의 지명 유래 이야기가 전한다. 원래 "(정몽주가) 풍덕에서 오신다”라고 하여 "풍덕래(豊德來)"라 한 것을 1914년 지명 표기 작업을 할 때 ‘올 래(來)’자를 ‘내 천(川)’자로 바꾸어 풍덕천(豊德川)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일설에는 풍덕천이 물이 깊어 명주 한 필이 다 들어갔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풍덩풍덩 빠져죽어 풍덩내[川]라고 하던 것이 풍덕이 되었다고도 한다.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포은과의 관련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관련이라 했지만, 좀 더 정확히는 후대의 부회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것이 "풍천"이라는 지명은 충청도 충주나 전라도 순천 등지에서 두루 보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잘 모르겠다는 거다. 굳이 천착해야 할 이유도 없어 보인다. 쓸데없는 이야기로 보내보는 황사 심한 봄날이다.



2. 정몽주 묘


오랜만에 용인 처인의 능원리에 다녀왔다. 포은의 묘 좌우로 이석형과 포은 장손의 무덤이 나란히 용(龍)을 타고 앉아 있다. 이런 자리를 뭐라 하는데 잊었다. 몇 가지 궁금증이 일었다.


첫째, 능(들) 앞에 파놓은 작은 연못은 배산임수의 자격을 갖추기 위한 비보(裨補)인가? 아니면 현대조경가의 '솜씨'인가?


둘째, 만일 비보풍수의 개념에서라면 그걸 판 장본인은 누구인가? 포은의 후손인가, 이석형의 자손인가?


셋째, 포은이 원래 개성 풍덕군에 묻혔다가 고향으로 이장하게 된 이유와 조선조에 들어 포은의 충(忠)을 상찬하게 된 배경은 별도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넷째, 저 무덤 앞 비석 사이에 있는 돌맹이 두 개는 무슨 뜻인가? 이것도 예전에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섯째, 포은의 묘가 자리잡은 이후로 용인 땅이 명당이라는 얘기가 돈 것은 사실인가, 전설인가? 사실이라면 고려 때나 조선 초에는 음택풍수가 없단 말인가? 있어어도 볼 만한 '눈'이 없었거나 못 찾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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