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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Apr 13. 2024

낙화 이제(落花 二題)

        

           

(1) 설도(薛濤)의 「춘망사(春望詞)」     


  설도(대략 770~832)는 당대(唐代)의 명기(名妓) 겸 여류시인이다. 만년에 두보(杜甫)의 초당으로 유명한 성도(省都)의 서교(西郊) 근방에 은거하였는데, 그곳은 좋은 종이의 산지였다. 설도는 심홍색의 작은 종이에 시를 써서 명사들과 교유한바, 유명한 ‘설도전(薛濤箋)’이 그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설도는 다른 것으로 더 친근한 시인이다. 우선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춘망사(春望詞)’의 한 수를 읽어보자. ‘춘망사’는 총 4수의 5언절구인데, 시방 우리가 읽으려 하는 것은 세 번째 수이다.     

風花日將老 바람에 꽃은 떨어지려 하는데

佳期猶渺渺 님 만날 기약은 아득하기만

不結同心人 한 마음이건만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부질없이 편지만 접어보누나     


맺어지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사가 절절히 묻어나고 있다. 그런데 세 번째, 네 번째 구절에 ‘결동심(結同心)’이라는 말이 거듭 나타난다. ‘동심결(同心結)’은 사랑하는 사이에 정표의 의미로 화초나 물건으로 만든 여러 가지 매듭이나 장식물을 총칭하기도 하지만, 대개 연서(戀書), 곧 연애편지를 의미한다.     


그런데 눈치 빠른 사람은 이미 마지막 구절의 ‘동심초(同心草)’를 보고 가곡 <동심초>를 떠올렸을 것이다. 바로 안서 김억이 번역한 이 시에 작곡가 김성태가 곡을 붙인 노래가 바로 그것이다.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이 정도 번역이면 가히 창작이라 할 만하다. 마지막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로 해서 ‘동심초’가 풀이름인 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지만, 앞서 이야기한 대로 연애편지를 의미하니, 식물도감을 찾아볼 일은 아니다. 김성태는 이어 2절을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 덧없어

만날 날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김억보다는 좀 떨어지는 심상인 듯하나, 절창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시는 김억이 살았던 같은 시대에 일본에서도 佐藤春夫(사또 하루오; 1892~1964)에 의해 번역되었다. 역시 절창이라 할 만하다.     


しづ心(こころ)なく散る花に 마음 흩뜨리며 날리는 꽃잎에

なげきぞ長きわが袂(たもと) 탄식으로 기나긴 나의 소매여

情(なさけ)をつくす君をなみ 정을 다 바친 그대 가고 없어

つむや愁(うれい)のつくづくし 헛되이 뜯는구나 슬픔의 풀잎     


한시 중에는 정말 절창인 노래들이 수없이 많다. 다만, 그것을 감상하기 어려운 것이 문제다. 이제 시인들과 한학자들이 손을 잡고 한시를 어두운 골방에서 불러내 새로운 절창을 빚어내야 마땅하다. 김억이 한 작업(『김억한시역선』, 한국문화사, 2005)을 이어가야 한다. 재능 있는 시인들이여, 가곡 <동심초>를 틀어놓고 차 한 잔 하시면서 한시 살려낼 궁리를 해 보시는 것은 어떠신가?    

      

(2) 장유(張維)의 「작은 섬돌 위에 핀 모란꽃(小階牧丹)」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말하자면 주류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당시에 이단시되던 양명학이나 노장사상에 정통한 것으로 이름이 났던 장유(張維; 1587~1638)의 ‘모란 시’를 읽어보자.     


 즐거운 맘 사라진 병든 몸이언만 / 衰疾歡情謝

 아름다운 꽃 두 눈에 확 들어오네 / 名花照眼奇

 누추한 집 마다하지 않고서 / 何嫌衡宇裏

 늦봄을 가득 채우고 있네 / 獨占艷陽時

 햇살 받은 꽃잎은 서책에 향긋하고 / 日蕚薰書帙

 하늘 향기는 술잔 속에 스몄더니 / 天香入酒巵

 문득 슬픈 오늘 아침 / 今朝忽惆悵

 비바람에 반이나 저벼렸구나 / 風雨半離披   

  

  만사가 귀찮은 병든 몸이지만, 새삼스레 화사한 모란이 눈에 반갑다고 했다. ‘하늘 향기[天香]’는 보통 계수나무ㆍ매화ㆍ모란 등의 향기를 말하는데, 특히 모란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천향국색(天香國色)’이라는 표현을 즐겨 써 왔으니, 여기서는 매화의 향기를 지칭할 터이다. 몸은 비록 병들었지만, 모란 향에 취해 술잔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햇살 받은 꽃잎 서책에 향긋’이란 표현은 시인의 품성이 따뜻하고 지적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햇살 받은 꽃잎[日蕚]’이란 표현은 시인의 독창이 아니라 한유(韓愈; 768~824)의 것이다. 한유는 “태양 빛 비친 꽃잎 눈부시게 빛나고, 바람에 나뭇가지 한들거리네[日蕚行鑠鑠 風條坐襜襜]”라고 노래한 바 있다.[『한창려집(韓昌黎集)』 卷4 「고한(苦寒)」]


  이러한 풍류와 여유를 동시에 보여주는 이 시의 주된 심상은 역시 ‘(꽃이 지니) 문득 슬프다[忽惆悵]’는 표현에 있는 것 같다. 지극히 낯익은 방식이다. 즉각적으로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문학』 3호(1934.4)]이 연상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의 시가 좀 더 여성적이고 격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는 있어, 약간 호들갑을 떨고 있지 않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봄을 여읜 설움’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두 시의 대세는 같다. “꽃이 지는 아침은 / 울고 싶어라”라고 한 조지훈의 「낙화」와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고 한 이형기의 「낙화」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방식만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봄이 와서 좋은데, 꽃이 지니 서글퍼라’라는 반응은 좀 재미가 없어 보인다. 다른 방식으로 노래한 시도 분명 있을 것인데, 그리 눈에 많이 띄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그러나 없지는 않다. 다음 시를 읽어 보자.     


 목련이 지는 것을 슬퍼하지 말자

 피었다 지는 것이 목련뿐이랴

 기쁨으로 피어나 눈물로 지는 것이

 어디 목련뿐이랴     

 우리네 오월에는 목련보다

 더 희고 정갈한 순백의 영혼들이

 꽃잎처럼 떨어졌던 것을

 해마다 오월은 다시 오고     

 겨우내 얼어붙었던 이 땅에 봄이 오면

 소리 없이 스러졌던 영혼들이

 흰빛 꽃잎이 되어

 우리네 가슴 속에 또 하나의

 목련을 피우는 것을     

 그것은

 기쁨처럼 환한 아침을 열던

 셀레임의 꽃이 아니요

 오월의 슬픈 함성으로

 한 잎 한 잎 떨어져

 우리들의 가슴에 아픔으로 피어나는

 순결한 꽃인 것을     

 눈부신 흰 빛으로 다시 피어

 살아있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고

 마냥 푸른 하늘도 눈물짓는

 우리들 오월의 꽃이

 아직도 애처로운 눈빛을 하는데

 한낱 목련이 진들

 무에 그리 슬프랴     


  박용주라는 ‘시인’의 「목련이 진들」[『바람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 장백, 1989]이라는 시다. ‘시인’이라고 굳이 따옴표를 친 이유가 있다. 이 시는 1988년 당시 열다섯 살의 중학생이 지었기 때문이다. 이 ‘시인’을 유별난 경우로 치부하고 넘길 수 없는 것은, “한낱 목련이 진들 / 무에 그리 슬프랴”라는 시구를 얻기까지 우리 시사(詩史)는 수많은 ‘우여’와 ‘곡절’을 거쳐 와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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