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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Apr 17. 2024

옛 생각 낙수(落穗)


- 어서 루카치 식의 '전투적 리얼리즘'에 열광하면서도, '부르주아적 모더니즘'에 살짝 주눅이 들곤 했었다. 그리고 그것이 아직 철저하지 못한 세계관 때문이라고 자책했었다.


- 학창시절 <창비>는 1년에 4권씩 꼬박 사면서, <문지>는 제때 제돈 주고 사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기저기 다니면서 한참 지난 과월호를 한 권씩 사 모으기도 했다. 그건 일종의 비밀 의식이었다.


- 리얼리즘을 '현실주의'라 할 것인지 '사실주의'로 번역할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입장이 그때는 확실히 정립되지 않았었다. 현대문학'비평'에서는 현실주의를 선호한 반면, 고전문학'연구'에서는 사실주의를 즐겨썼다. 물론 리얼리즘을 그냥 쓴 이도 있었다. 말로 풀자면 길어지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 '전형(성)'은 비평에서든 연구에서든 대단히 인기 있는 개념이자 도구였다. "리얼리즘은 세부적 진실 외에도 전형적인 상황하에서 전형적인 인물의 진실된 재현을 의미한다"는 엥겔스의 발언에 대한 신봉 비슷한 게 있었다. 그런데 난 아직도 이 말의 함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받아들이려면, 아무리 허구라 하더라도, 우선 인물이 일관성과 정체성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텐데, 그것이 잘 안 되기 때문이다.


북에서는 춘향과 이도령을 신분과 계급을 타파하기 위한 전사이며, 둘의 사랑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연대로 규정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하나의 이념형에 불과하다. 이른바 포에시스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춘향전>이 빛나는 건, 춘향과 이도령이 사랑을 통해 점차 자신을 변화시켜 나간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사씨남정기>의 교채란은 원래부터 악인이 아니라, (여기서 상세히 말하기 어려우나) 상황의 변화가 그녀를 악인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교채란의 성격에는 일관성이 없다. 불안을 이기려고 끊임없이 요동치는 살얼음을 밟는(핑크 플로이드의 thin ice처럼) 존재인 것이다.


(1960~70년대) 북에서는 교채란의 형상을 앵겔스에 입각해서, 전형적인 상황에서의 전형적인 인물을 진실되게 구현한 '리얼리즘의 승리'라 평가했다. 한마디로 재단비평이다.


만일 <사씨남정기>에서 리얼리즘적 성취를 말한다면, 나는 그것을 교채란의 불안한 욕망과 그것에 대한 인정, 그리고 그 결과로 '드러나게 된' 현실의 취약성 같은 데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 시가 착하다는 건 시인이 치열하게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착한 시'는 엄혹한 세상에서 벌이는 유아기적 천사 코스프레일 뿐이다.


주례비평이란 게 있다. 듣기 좋은 소리로 시인에게 아첨하는 비평이다. 요즘 어떤 글을 읽어 보니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간 듯하다. 설교비평. 사랑, 행복, 평화, 배려, 겸손 등이 그 평론의 키워드이다.


결국은 문학이 설 자리를 빼앗아갈 이런 '착한 설교 비평'에 대해 평론계에서 침묵하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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