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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May 11. 2024

저녁 단상

사악한 자들의 특징은 ‘좋은 말’을 너무 많이 한다는 것이다. '사대강사업'으로 분탕질을 해대면서 그것이 '4대강 살리기'라고 주장하고,  '의료민영화'를 밀어붙이려고 하면서 의료서비스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키겠다고 한다. 노동유연성이라는 묘한 말을 앞세워 무지몽매한 인민을 속이면서 자본가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하고,  기득권을 지키고 유지하려고 모든 질서는 아름답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사관계’처럼 비열한 말도 없을 것이다. 노동자를 쓰다 버릴 물건처럼 대하는 자를 사용자라고 부르는 것이야말로, 괜시리 자본가니 뭐니 하는 것보다 차라리 더 솔직한 말인지 모른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실제로 그렇게 쓰다 버리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도 사람을 최소한 물건 취급하는 건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을 도구처럼 사용하면서 인간성 운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흔히 과공비례(過恭非禮), 곧 지나친 공손함은 예가 아니라고 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상대를 이용의 대상으로 써먹기 때문이다. 예컨대 아부꾼들의 마음속에는 자기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상대의 지위를 이용해 먹으려는 욕망이 요동치고 있다.


예전에 소외(疏外)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만든 것들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그것의 부림을 받게 되어 타자로 전락하는 상황을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돈은 경제를 잘 운영하기 위해 만든 제도이지만, 지금은 돈이 사람을 죽이고 살린다.


소외와 함께 가치전도(價値顚倒)란 말도 많이 썼다. ‘전도’란 “주객이 전도되었다”는 말에서 보듯이, 차례, 위치, 이치, 가치관 따위가 뒤바뀌어 원래와 달리 거꾸로 된다는 뜻이다. 가치에는 교환가치와 사용가치가 있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사용가치는 그것이 지닌 고유의 값어치를 그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물건[상품]이 다른 것과 어느 정도로 교환될 수 있는가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교환가치와는 다른 차원의 가치다. 아버지가 물려주신 고물 시계는 내다 팔려면 쓰레기 취급을 당하지만, 내겐 둘도 없이 소중한 것이다. 지금은 교환가치의 시대다. 결혼이 교환의 전형적인 사례의 하나가 된 것은 이미 오래 전의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는 점점 더 필연적인 것이 될 터이고, 그런 만큼 가치는 급격히 전도될 것이다.


갑자기 웬 훈장질이냐 하면, 다 아는 얘기를 다시 해야 할 필요를 느껴서이다. 공자님은 일찍이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라고 했다. 너무나 유명해서 흥부전에서는 봄날 지저귀는 제비소리를 저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앎이다”라는 뜻이다. 요즘 보면 이것저것 아는 것은 많은 것 같아 보이는데, 그것이 그의 삶하고는 전혀 따로 노는 경우를 종종 본다. 활짝 웃는 미소 속에 감추어진 영악한 눈빛이 섬뜩할 때가 있다. 행복하게,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하면서 소외에 앞장서고 가치를 전도시키는 데 이골이 나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이 딱하고 안쓰러워서 해 보는 얘기다.


표리부동도 분수란 게 있다. 이렇게까지 넌즈시 말을 전해도 이것을 남의 얘기인 양 치부할 테니, 그것이 좀 걱정이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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