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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경환 May 12. 2024

Sati, Mindfulness, 마음챙김


오랜 시간 원시불교를 연구한 각묵 스님이 1600년 전 구마라즙 번역본과 현장법사 번역본을 산스크리트 원문과 상세히 비교해 펴낸 <금강경 역해>(불광출판사, 2001)를 열독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를 사로잡은 말은 “산냐(saññā)”, 곧 상(相)과 "사티(sati)", 곧 염(念)이었다. 이 중에서 사티를 각묵스님은 “마음챙김”이라 옮겼다. 적실한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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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중년 이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비참을 경험하고 거기서 기어이 뚫고나온 장현갑 선생의 기록 <심리학자의 인생실험실>(불광출판사, 2017)을 읽었다. 거기도 “마음챙김”이 나온다. 영미권에서 쓰는 mindfulness를 그렇게 풀이한 모양이다.(편견이겠지만, 나는 fulness의 뜻 때문에 이 말에 약간 거부감이 든다.)


장선생님은 미국의 MBSR(mindfulness based stress reduction)을 우리 실정에 맞게 고쳐 K-MBSR을 창안했다. 그 수련의 요체는 이렇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번뇌는 마음이 속절없이 방황하는 상태다. 그러니 한 곳에 집중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그 핵심은 “지금”, “이곳”에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두고 달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치 원귀들이 나대면서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하듯, 과거로 달려가 불쾌한 기억을 끄집어 오거나, 미래로 달려가 있지도 않은 것에 대한 불안에 사로잡히게 된다.


“안의 것이 다 무너지고 있는” 이때 할 일은 이것뿐일 듯. 오직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나씩만 해내고,  한 눈금만 더 나아가 보자는 것!


덧.

“satīῑ”는 남편이 죽으면 시체를 화장할 때, 아내가 불 속에 뛰어들어 남편의 시체와 함께 불타는 힌두교의 풍습이다. 이 말은 스피박의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에서 처음 보았는데, 그녀에 따르면, 이것은 강요가 아니라 여성의 자유의지의 모범 사례였다. 좋은 아내로서 여성이 해야만 하는 행동, 말하자면 과부 자신이 지닌 욕망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이트에 들어가는데, 별명을 물어보기에 생각이 났다. 십여 년 전부터 “sati”라고 대답했는데, “satī”를 알고부터는 좀 꺼려졌었다. 그런데 한편 그냥 써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스끄리뜨어 발음에서는 차이가 나겠지만, 그 차이를 지우니 오히려 일종의 반어(irony)일 수도 있겠다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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